나의 살던 고향은~~
아~~~ 아침 시간이 사실 저에겐 아주 중요하거든요.
아침 시간에 내가 꼬옥 하기로 마음 먹은 일들을 하지 못하면 하루가 왜 그렇게 개운치못한지....
오늘은 월요일이라..설레는 마음을 안고 여느때보다 조금 일찍 출근했죠.
그.런.데. 날이 좋아지면서 다들 부지런해지셨는지 회사까지오는데..정확히 한시간하고도 30분이 더 걸려버렸네요. 덕분에 설레이던 저의 아침 시간은 반이 절뚝 날라가버려서 계획에 차질이 이만저만이 아니에요.
투덜투덜투덜...... ^^!!!!!
그 오랜 시간을 차에 있으면서 책도 보다가..음악도 듣다가..
파란 하늘을 보면서 살짝꿍...추억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답니다.
아주 어릴 땐..
이사를 남들보다 조금 많이 다녀서 다양한 추억이 있긴하지만
'고향'이라고 부를만한 곳은 제겐 없었던것같아요.
그.래.도. 누군가가 물어보면 '고향이 어디세요?' 이제는 '포항이요!!'라고 대답할 수 있는걸 보면..
초등학교 4학년무렵부터 살기 시작했던 그곳이 주는 의미가 분명 남다른것이겠죠.
한창 새로운 4학년 생활에 적응하고..
잘생긴 부반장이 나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여주어서 학교생활이 설레기까지 하던 저에게 느닺없이 이사를 간다는 것은 심한 정신적 갈등을 불러일으킬만한 힘든 사건이었죠.
그렇다고 내가 우긴들..가지 않을 이사가 아니었기에 좋은 친구들..미련가득한 풋풋한 남자 친구(^^)를 뒤로하고 전 먼곳으로 떠나와야 했었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중요한 일을 결정하실땐 너무나 조용하셔서 저희는 우리가 가는 그곳이 어떤 곳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오랜 시간 기차를 타고..버스를 타고..택시를 타고
하루종일 길에서 지쳐있던 저희들이 들어선 마을은 분명 저에겐 낯선 곳이었습니다.
아파트나 차나..슈퍼마켓이나 여느 동네에서 볼만한 경관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어두운 밤에 드문드문 보이는 불빛에..
길다란 오징어잡이배의 전등빛같은 쪼로롬한 백열등이 간혹 세트로 보이기도하고..
무엇보다 저에게 낯설었던 것은 코를 한순간에 마비시켜버리는 심각한 악취(^^)였습니다.
그러나 그 악취로 인한 마비 상태는 그 다음에 이어진 충격에 비하면 양호한 것이었습니다.
기다리던 목사님댁 가족들이 인천에서 도착했단 소식을 전해들은 동네분들은
인사를 하겠다고 저희집으로 몰려오셨고..
대청마루 무대위에는 저희 세자매가 나란히 서서 손님들께 인사할 준비를 했습니다.
손.님.들.은. 좁은 사택에 들어서지 못하곤
미닫이 현관 문을 활짝열고 문밖에 빼곡히 서서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지요.
인사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몰려드는 손님들을 보는 순간 전 머리부터 발끝까지 진정 얼어붙고 말았던 것이죠.
어두운 밤의 장막을 배경으로하고..
하나둘씩 모습을 비친 손님들의 모습은
영화 ''황혼에서 새벽...'의 좀비들을 연상하게 했습니다.
절뚝절뚝.. 일그러진 얼굴은 어디가 코인지 입인지 분간이 되질 않고
대부분 손가락이 어디로 갔는지.. 손이 주먹을 쥔것인지 편것인지 알 수가 없는 정녕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환하게 웃으시는 아버지는 저희들을 한명씩 소개해 주셨고..
소개될때마다 박수치며 이쁘다고! 귀엽다고! 손을 뻗으며 안아보시려는 손님들덕에
전 눈물을 꾸역꾸역 삼킬 수 밖에 없었답니다.
손님들이 돌아가시고 난 늦은 시간
충격과 장거리 여행의 피로에 정신없는 저희들을 자리에 앉히고 아버지는 차곡차곡 설명해주셨습니다.
그 곳이 어디인지.. 왜 아버지가 그곳에 오셨는지..
그리고 그 분들이 많이 아프셨던 분들인데 흉터가 너무 심햬서 이곳에 모여 사는 것이라는 친절한 설명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설명을 모두 이해해서였는지 적응력 120%의 천성 덕분인지 그날의 충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전 동네 아이들과도 금방 친해졌고.. 양계와 양돈이 주 산업이었던 그 마을에서
친구들과 번갈아가며 달걀거둬내는 아르바이트도하고
가끔..누구네집에 새로운 영계가 들어온다면 일렬로 쭈욱 늘어서서 닭을 옮겨주는 한건당 500원하는 아르바이트도하고
올망졸망 한마을에 모여살던 때라 한밤중에도 위험이라고 전혀 느낄 수 없는 마을에서 밤늦도록 별보며 수다도 떨고, 한 여름엔 이쁘게 달린 복숭아를 말만잘하면 거저도 주는 것을 잠도 안자고 몰래몰래 서리해 먹으며 얼마나 좋아라 하며 지냈던지요.
지금 생각하면 지저분하기 그지없는 논옆의 개울에 여름엔 줄지어서서는
불쌍한 송사리를 누가많이 잡나 내기도하고..
버스 정류장에서 4km는 걸어야 들어오는 마을이라
사료차던..분뇨차던..
닥치는대로 손을 흔들고 용감하게 세워서는 초롱초롱 맑은 눈빛으로 아저씨의 마음을 얻어
공짜로 얻어타고 오는 쏠쏠한 즐거움이 있던 곳이었지요.
게다가 양봉에서부터 토끼, 오리, 칠면조, 각종 명견~~
동물을 좋아하시는 아버지 덕분에..
개먹일 죽은 닭 얻으러 다니기!!
봄에는 토끼풀 뜯으러 다니기!!
저녁마다 오리랑 칠면조 우리로 몰아넣기!
여름엔 말벌잡이 보초서기! 개집 청소하기!!
새끼강아지 우유먹이기..
실로~~ 함부로 경험할 수 없는 소중한 추억들로 제 고향의 추억들은 가득 넘치고 흐른답니다.
그덕분에 사람을 보는 편견도
불편하고 무리가 있을법한 지저분한 곳에도 쉬이 잠드는 참으로 훌륭한 적응력도
이미 몸에 배여서 익숙해져버린 듯합니다.
이번 여름엔 꼬옥 한번..다시 그곳엘 가보고 싶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돌아오면 그렇게 가겠다고 마음먹었었는데
추억이 있고 사랑이 있고 내 인생의 가장 큰 우상인 아버지의 형상이 있는 그곳에
이번엔 반드시 다녀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