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치츄카가이와 데지마를 통해
얼마 전 일본에 다녀왔습니다. 규슈에 위치한 후쿠오카와 나가사키를 다녀왔습니다. 특히 나가사키는 공부를 하면서 많이 접한 도시입니다. 한국에 관광지로서 잘 알려진 후쿠오카에 비해, 역사 교과서를 통해 많이 알려진 도시이기도 합니다.
나가사키는 에도막부의 대외 정책에 있어 중요한 도시입니다. 서양으로는 유일하게 네덜란드와 교역하였고, 대륙과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중국과의 교역도 활발했습니다. 이러한 에도시대의 일본 대외무역의 흔적은 나가사키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본 글에서는 본인이 직접 다녀온 나가사키에서 발견한 에도시대의 일본 대외무역의 흔적을 찾아보고, 그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탐구해보고자 합니다.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 신치마치
長崎県長崎市新地町
일본과 중국의 교류는 상당히 오래되었습니다. 지리적으로 가까운 만큼 이들의 교류는 필연적입니다. 야마타이국의 히미코, 견당사, 임진왜란 등은 일본과 중국 사이의 우호적·적대적 관계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가사키가 중일 간 무역 교류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명나라 때입니다. 명나라는 당시 조공국을 대상으로 감합무역을 실시하고 있었는데요. 명나라가 발급한 감합(도항증명서)을 소지한 선박과의 무역만 허가하는 무역체계였습니다. 당시 일본을 지배한 무로마치 막부는 명에 조공을 한 대신 감합을 발급받아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감합무역을 행한 것입니다.
이후 센고쿠시대를 거쳐 일본에는 에도 막부, 대륙에는 청나라가 권력을 잡았습니다. 청나라가 천계령(해금정책의 일종. 명나라를 부활시키고자 한 정성공에 맞서 사람들의 해변가 접근을 금지)을 해제한 이후 푸젠 성을 중심으로 많은 중국인들이 나가사키로 건너가 자리를 잡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에 의한 밀무역이 성행하자 에도 막부는 지금의 신치 차이나타운 근처에 당인저택이라 하여 중국인 주거구역을 설정하고 이곳에서만 살게 했습니다.
이후 1698년, 청나라와 교역하던 항구가 화재로 소실됩니다. 막부는 이 화재를 계기로 당인저택 앞바다를 매립해 중국인 전용 창고를 설치했는데, 이때 매립된 땅이 지금의 차이나타운이 위치한 신치(新地)입니다. 당인저택은 18세기에 한 번 더 화재가 난 뒤 복구되었다가, 1859년 일본이 개항된 뒤 폐옥화 되어 1870년에 소실되었습니다. 당인저택에 살던 중국인들은 개항 이후 신치로 건너가 지금의 차이나타운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나가사키라고 한다면 나가사키 짬뽕(長崎ちゃんぽん)을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나가사키 짬뽕 역시 중일 간 교류의 산물입니다. 중국 푸젠 성 지역에서 이주해 온 화교들이 자신들이 먹던 요리와 일본의 요리를 합쳐서 만들어진 것이 나가사키 짬뽕입니다.
19세기 이후 일본이 근대화되어 성장하자 푸젠 성의 지식인들은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나가사키로 유학을 옵니다. 이때 이 지역에 살고 있던 화교들이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판매하던 음식이 바로 나가사키 짬뽕입니다. 국수 요리는 예나 지금이나 돈 없을 때 먹기 좋은 음식이었으니까요. 이러한 역사를 가지고 태어난 나가사키 짬뽕은 일제강점기에 한국으로 전파되어, 해방 이후 한국인들이 고춧가루 등을 넣어 한국식 잠뽕이라는 새로운 음식을 만들기도 하였습니다.
나가사키현 나가사키시 데지마마치
長崎県長崎市出島町
데지마는 일본과 서양을 이어주는 유일한 교역지였습니다. 일본은 센고쿠시대 교역과 선교를 목적으로 포르투갈 사람들이 가고시마에 들어온 것을 시작으로 서양과의 교역이 시작되었습니다. 에도 시대에 들어 막부에 있어 포르투갈은 정치적 눈엣가시였습니다. 일본의 신분질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기독교를 계속해서 전파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1634년, 막부는 나가사키 앞바다를 매립해 인공섬을 만들기로 합니다. 이 섬에 포르투갈인들을 몰아넣어 포교를 막아보자는 심산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일본 곳곳에 전파되었고, 1637년 나가사키 부근에 있는 시마바라에서 기독교들이 난까지 일으키게 됩니다. 이를 계기로 막부는 포르투갈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포르투갈과의 무역을 중단했습니다.
이 시기 함께 교역하던 네덜란드는 기독교 포교를 하지 않고, 데지마 내에서만 상주한다는 조건으로 단독 교역을 허용합니다.
이로써 1641년 히라도에 거주하던 네덜란드 상인들이 데지마로 옮겨오며 1859년까지 200년 가까운 데지마 교역이 시작됩니다. 네덜란드인들은 데지마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올 수 없었으며, 일본인 역시 허가 없이 데지마로 출입할 수 없었습니다. 하역 작업 등 교역에 필요한 최소한의 일본인들만 출입이 가능했습니다.
네덜란드와의 무역에서 일본은 금, 은, 특히 구리를 대금으로 지급했습니다. 네덜란드는 중국산 생사나 견직물, 약품, 사탕수수 등 설탕, 향신료 등을 일본에 팔았습니다. 또, 이 시기 난학이라 하여 네덜란드를 통해 천문학, 해부학, 의학 등 과학기술이 유입되어 일본의 과학기술이 발전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데지마 안에서는 서양식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유럽산 그릇이나 유리제품, 서양식 식기구들도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이때 생활상을 그린 우키요에를 보면 나가사키 내 유곽에서 일하던 여성들이 데지마에서 네덜란드인들을 접대하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200년 넘게 일본과 서양의 유일한 교역로였던 데지마는 일본의 개항으로 달라집니다. 흑선 내항 이후 일본이 개항하자 네덜란드인들의 나가사키 시내 진입이 허용되었습니다. 또, 나가사키 개발 목적으로 메이지 이후에는 데지마 일대의 땅이 매립되며 상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다이쇼 시기에는 데지마 일원이 사적지로 지정되었고, 그로부터 70년 이상 지난 1996년이 되어서야 복구 사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일본의 무역 중심지였던 나가사키는 흑선 내항 이후 요코하마, 고베 등 다른 항구들이 개항하며 자연스럽게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도쿄와 가까웠던 요코하마, 상업 중심지인 오사카 근교의 고베 등이 외국과의 교류 중심지로 성장한 것입니다. 이 시기 나가사키도 개항했지만 도쿄, 오사카라는 중심지를 가진 요코하마, 고베에는 비견될 수 없었습니다. 중국인들의 경우 요코하마와 고베에도 차이나타운을 형성했고, 요코하마에 가장 큰 차이나타운이라는 지위를 내어주게 됩니다.
그러나 메이지 이후 나가사키는 조선업의 거점으로 성장했고, 전쟁 산업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조선인들이 강제로 끌려가 노동하던 군함도도 이곳 근교에 있습니다. 외국과의 교류의 거점이었던 나가사키는 근대에 접어들어 외국을 향해 총을 들이미는 군수 산업의 중심이 된 것입니다. 결국 2차 세계대전 말 원자폭탄이 떨어지며 도시는 한순간에 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가사키는 다양한 나라들과 교류를 이어갔습니다. 우리나라와도 좋지 못한 쪽이긴 합니다만 인연이 깊은 도시입니다. 한때는 외국과 소통하는 창구였지만, 다른 한때에는 소통을 멈추고 그들을 향해 총부리를 겨눌 준비를 한 곳. 소통과 적대라는 상반된 과거를 가지고 현재의 나가사키는 과거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