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렌피딕은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싱글몰트 위스키이다. 글렌피딕이란 이름은 몰라도 사슴모양은 한 번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만큼 대중적인 맛을 자랑하는 위스키라고 할 수 있다.
내 인생 첫 위스키는 바로 이 글렌피딕이었다. 그 전까지는 바에서 칵테일만을 마셨는데 그날따라 위스키에 도전해 보고 싶어서 글렌피딕 12년을 주문했다. 이름도 읽을 줄 몰라서 글렌피디치라고 읽었던 기억이 있다. 그렇게 마셨던 글렌피딕은 나를 위스키의 세계로 이끌게 되었다. 40도라는 도수는 지금의 나에겐 높지 않지만 그때의 나에겐 굉장히 높고 두려운 도수였다. 고도수의 술을 마시면 식도가 타는 느낌이 든다는 등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었었기에 조금은 두려웠지만, 이미 칵테일을 마시고 취했던지라 용기내어 마셨다. 너무 맛있었다. 생각보다 독하지도 않았고, 향도 너무 좋았다. 위스키라는 술이 이렇게 맛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뒤로 나는 여러가지 위스키를 마시게 되었다. 피트 위스키도 마시고, 버번도 마시고, CS도 마셨다. 그렇게 다양한 위스키를 마시면서 글렌피딕은 나에게서 점점 잊혀져갔다. 특히 새로운 바를 가면 다른 바에는 잘 없는 위스키들 위주로 마시게 되었는데, 글렌피딕은 너무나 흔한 위스키이고 어디서나 마실 수 있기 때문에 잘 손이 가질 않았다.
며칠전 보다에 갔다가 쉐리 위스키들을 마셨다. 아란 쉐리 CS와 글렌알라키 10 CS를 마시고, 다음엔 뭘 마실까 고민하던 중 갑자기 글렌피딕 18년이 떠올랐다. 이미 쉐리 위주로 마셨겠다, 오랜만에 글렌피딕을 마셔보자는 마음으로 글렌피딕 18년을 주문했다. 글렌피딕 18년은 정말 휼륭했다. 이미 CS 위스크들을 마신 뒤라 40도에 불과한 글렌피딕의 맛과 향이 잘 느껴지지 않을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너무나도 달콤한 사과 향과 자두 맛, 부담스러지 않은 도수와 오래 남는 피니쉬에 매우 놀랐다. 그동안 CS 위스키들을 마시며 40도 위스키들은 거의 마시지 않았는데, 낮은 도수에서도 이렇게 풍부한 맛과 향을 느낄 수 있다는 걸 다시 느끼게 되었다. 그러고는 글렌피딕이 전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싱글몰트 위스키임을 다시금 느꼈다. 내가 그동안 글렌피딕을 잘 마시지 않았던 이유이지만 사실은 글렌피딕의 가장 큰 장점이 바로 이 점이었다.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지만 퀄리티 관리가 잘 되어있고, 대중적인 맛이지만 남부럽지 않은 맛. 그것이 글렌피딕의 매력이다.
만약 내가 첫 위스키로 글렌피딕이 아닌 다른 위스키를 마셨다면 지금처럼 위스키를 좋아하고 있을까? 만약 첫 위스키로 질 낮은 저가의 블렌디드 위스키를 마셨거나, 도수가 너무 강한 CS 위스키를 마셨다면 아마 그 다음 위스키는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글렌피딕이 대중적인 맛을 가지고 있고, 어디서나 쉽게 마실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위스키에 빠지게 된 것이다. 글렌피딕보다 더 맛있거나 특별한 위스키는 많다. 하지만 위스키계에서 글렌피딕은 글렌피딕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처럼 내가 잊고 있었던 무언가에 대해 다시금 그 가치를 깨닫게 되는 일은 굉장히 즐겁다. 오늘 친구와 술을 마시며 취미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나에게 위스키라는 취미가 있다는 것이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 하나의 취미를 선물해준 글렌피딕에게 감사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