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는구나, 마침내.

<헤어질 결심>을 5번 보다, 잊지 않기 위해

사랑에는 언제나 약간의 망상이 담겨있다. 그러나 망상 속에는 언제나 약간의 이성이 깃들어 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헤어질 결심>을 다섯 번 봤다, 기억하고 싶어서.

중의적, 묘한, 파란, 외로운, 사랑의, 영원한, 괴로운, 우아한 욕망..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이 가득 담긴 영화.


오랜만에 쓰는 무언가에 대한 감상평이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 관한 글이 될 줄은 몰랐다.

예전엔 많은 글과 그림으로 내 감정을 기록했었다. 열심히 눈에 보이는 대로 종이만 있으면 펜으로 그리고 쓰고.. 뭘 위해서 그렇게 했나 싶을 정도로 남기려고 했다. <헤어질 결심>은 나의 열정을 복기하는 원동력이 된 영화다. 좋아하는 것들을 상자 속에 넣어서 마음속 깊은 곳에 숨겨놨다가 꺼내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었다.


재충전 뒤 시작하는 (진지한) 취미생활이다. 공개적인 첫 포스팅인데, 그 대상이 국내영화일 줄이야. 이렇게 푹 빠져서 며칠 동안 의미를 곱씹고, 놓친 장면이 있었나 마음이 조마조마하며 생각나게 하는 영화는 정말 오랜만이다. 나는 영화를 좋아하고 영상물에 대해서 저녁 먹고 와인 마시면서 오래오래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조만간 혹은 훗날 내가 대표로 브랜딩스튜디오를 운영한다면 - 그 이름도 저녁식사와 와인과 파티 애프터타임에 관한 네이밍이 될 것이다. (이미 지어놓고 아직 써먹지 못했다. 언젠가 다시 꺼내서 써야지)

이 글쓰기의 동기와 용기가 되어준 사람들이 있다. 영화와 영상물 이것저것 보고 감명받고 리뷰 쓰는 것을 좋아해서 어릴 때부터 영화 스크랩북을 만들기도 했고 잠시 간간이 불성실하게 리뷰블로그도 운영했었다. 그곳은 소소한 나 혼자만의 공간이었고 그 이후로 아예 묵혀놓고 홀로 영화를 즐기는 것만 유지하다가 좋은 친구들을 만나서 작은 규모로 정기적인 영화모임을 가지게 되었다.

적은 인원의 이 영화모임은 친목관계에서 시작되었지만 나름 까다로운(이 친구들은 영화를 나보다 훨씬 많이 본다. 마음에 드는 영화를 계속 복기해서 관람목록 자체가 아주 많지는 않은 나에 비해, 이들은 절대적인 관람수가 압도적이다) 셀렉션을 기준으로 영화를 고르고, 함께 관람하고, 그 영화에 대해 그날 함께 먹은 음식과 어울리는 술과 함께 진지하게 이야기도 하는 매우 적극적인 모임이다. 소수정예 모임이라서 서로 의견이 칼과 못처럼 부딪혀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무미건조하게 가만히 남의 이야기만 듣고 있어도 안되는데. 모두가 순서대로, 혹은 동시다발적으로(!) 조잘거리되 평화로운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이 포인트다. 정말 고맙게도 이 모임을 통해서 다시 내가 예전에 좋아했던 것에 대한 사랑과 날것 그대로의 열정이 되살아나는 기분이 느껴진다. 아직도 영화모임은 생생한 내 삶의 영역 일부로 유지되고 있다.


아무튼.

우리의 첫 번째 영화 단체관람에 이어, <헤어질 결심>은 ‘박찬욱 감독이 오랜만에 내놓은 작품’이라는 강한 동기부여로 두 번째 모임을 촉진시켰다. 그리고 나의 생각 여정은 아래로 이어지는데, 스포일러가 있으니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에겐 미리 경고합니다.



이 영화를 5번 감상하면서 감탄했던 포인트들은:


- 모호함의 미학

- 파란색, 혹은 녹색. 혹은 청록색.

- 시점, 관음

- 고전적이고 우아함 (대사)


였다. 저 4가지가 어울려져서 묘한 아름다움이 되었고, 그 모호한 매력에 푹 빠지게 되어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쓰면서도 기분이 점점 묘해지는 영화다.




모호함에 관하여, 안개와 함께

감정을 오롯이 표현하는 것은 힘들다.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모호하고 밤에서 넘어가는 새벽처럼 희미한 경계선, ‘끝나도 끝나지 않은 것처럼’ 정리되고 기억되는 것 같다.

사랑의 감정, 연민의 감정도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묘한 감정, 아름다움 그 자체라고 생각된다. 나는 과거에 사랑할 때 어느 순간 어떤 포인트에서 그 사람에게 빠져들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 사람 왜 좋아해?라고 물었을 때, 목소리가 좋았어서, 눈이 예뻐서, 첫사랑이어서..라는 피상적인 이유를 읊다 보면 ’ 진짜 왜? 언제부터?’라는 생각이 든다. 좋음과 사랑함의 시작점과 기준은 항상 모르겠다. 모든 것이 흐릿하지만 향기는 또렷한, 경계선 안과 밖 너머에서 요동치는 느낌이다. “그냥 좋았어, 왜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어.”라고 대답을 자주 했다.


<헤어질 결심>에 대해서도 누가 “왜 이 영화가 좋아?”라고 묻는다면 형언하기가 모호하다. 왜냐면 플롯보다도(플롯은 단순하다고 생각된다!) 느낌으로, 감정으로, 마치 영화 속에서 사랑한다고 한 번도 육성으로 말하지 않았던 주인공 남녀의 관계와 같기에. 1번, 2번. 3번,, 같은 객관적 리스트업으로 이 영화의 매력이 정의되기 힘든 것 같다.

볼 때마다 왜 약간씩 느낌이 다른지 모르겠다. 처음엔 오묘했고, 그다음엔 주제가 비교적 명확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건 또 아니고. 최근 관람을 했을 때는 내가 놓친 무언가가 필름 현상액에 반쯤 잠겨서 드러나고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면서 그 형태는 필름 잔상처럼 떠돌다가 지워지고, 를 반복한다.

그렇지만 영화 엔딩에서 주인공의 무너진 마음만큼은 또렷하게 다가왔다.



살면서 마음이 무너져본 적이 있다.

상대적으로 어느 누군가보다 더 많이 살았을 수도 있고, 월등히 적게 살았을 수도 있고, 내 경험이 더 큰 고통을 가진 타인에겐 티끌만한 아픔일 수도 있다. 우주에 혼자 던져진 아기 같은 마음이 들 때가 있다. 그러나 이 우주 속에서 이만큼의 고통을 받는 사람들은 모래와 별처럼 무수할 것이다.

타인에 의해 무너진 마음은 영원히 미결사건으로 마음속에서 섬처럼 떠다니는 것 같다.

이 영화를 통해 진짜 사랑이었다는 것을 마침내 깨닫고 운명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해 알아버린 절망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체험해 본다. 생각하기 싫은 끔찍함이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잔인함 속에 특유의 미학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더 숨 막힐듯한 공포로 다가왔다.


해준은 스스로 구원할 수도 없는 죽음보다 더 깊은 불면증에 시달릴 것이다.



파란색, 아름다움에 관하여

아름다운 탕웨이와 드레스, 피날레의 푸른 코트.

박찬욱 감독은 아름다운 여자를 참 잘 찾아내고, 분위기 있게 표현하시는 것 같다. 그의 선택이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



시점, 관음

결정적으로, 아름다운 외모의 서래가 남자와 육체적인 관계를 가지는 장면은 전혀 등장하지 았았다. 대신 ‘숨을 나누는’ 장면이 나왔다. 잠을 선사함으로써 사랑이 줄 수 있는 가장 최고의 선물인 편안함을 준다는 건가.


나지막이 깔린 배경의 짙은 어둠과 두 사람의 거의 밀착된 옆모습 실루엣, 그리고 해파리가 둥둥 떠다니는 듯한 깊고 깊은 사랑이라는 본능..



시점 #2 | 깊은 바다, 부서지는 파도, 무서운 절벽

여운이 너무 강해서, 마지막 장면에서 나도 서래와 함께 깊은 바닷속으로 질식할 것 같았다. 그리고 온갖 범죄물을 봤었어도 이런 자살방식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참신하기도 하고, 저렇게도 죽을 수 있구나.. 하고 충격을 받았다. 개인적으로 영화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죽음씬에 들어갈 것 같다. 밀려들어오는 차가운 바닷물에 의한 자살이라니.

물론 죽음장면이 그녀의 마지막 모습까지 시각적으로 고통스럽게 그려지진 않지만, 상상력을 자극해서 그 여파가 더 큰 것 같다. 해준의 마음속에 그 장면이 영원히 재생될 것처럼, 내 기억 속에도 엔딩씬이 자리를 잡아버렸다..! 해준의 인생에서도 서래라는 존재가 그렇게 묻히고, 고통을 상기시키겠지.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개펄의 모래 아래로 끌려내려가는 불쌍한 영혼처럼. 안식을 찾으려고 하면 또다시 발목을 붙잡는 어둠처럼 영원히.

그 여운에 휩쓸려 며칠 뒤에 바로 또 2회 차 관람을 하러 갔을 때 옆자리 중년의 남성 네 분이 모두 눈물을 그렁그렁 맺힌 채로 엔딩크레딧이 끝나기 직전까지 움직이지 못하고 계신 것을 봤다. 한 분은 나지막이 친구분에게 속삭이셨다. “여자가 너무 불쌍해” 그리고 머리가 희끗하신 분은 크게 속삭였다 - “남자가 더 불쌍하다. 몰래한 사랑에 대한 가장 큰 죗값을 치르는 것 같아”라고 하셨다.



고전미, 지적인 대화, 메타포

나는 이 영화가 전체적으로, 고전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고전소설을 읽는 것 같은 우아한 영화였다.

외국인이기 때문에 평어보단 본인이 좋아하는 로맨스드라마에서 말을 배운 경어체의 서래와, 섬세한 성격과 남을 존중하는 마음씨를 지닌 ‘친절한 형사’인 해준의 우아한 말투가 섞여서 옛날 흑백영화들이 떠오른다. <카블랑카> 같은 아름다운 여배우들과 지적인 대사와 메타포가 섞인 고급스러운 대화가 오가는 남녀, 그리고 이뤄지지 못하고 강렬하게 타버린 사랑의 엔딩- 그런 것들을 꾹꾹 눌러 담은 영화들.


그리고, 아름다웠던 장면들을 나열해 보자면 -


- 분홍색 앙고라 스웨터를 입은 서래가 해준을 처음 재워주는 장면. 그때 서래가 헷-하고 웃는다. 진짜 좋아하는 상대 앞에서 부끄러워하는 모습. 찰나의 순간에 빨리 지나가는데 진짜로 좋아하는 수줍은 마음, 그리고 상대방을 귀여워하는 전형적인 콩깍지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 마지막 해안가 장면에서, 해준이 눈물을 주르륵 흘린다. 해준은 인공눈물약을 지속적으로 넣던 섬세하고 예민한 사람이다. 박해일의 얼굴을 바라보는 시점이 하늘에서부터 떨어지며 그의 절망적인 눈과 ‘아!’하며 탄식을 뱉는 표정을 잡는다. 2회 차 관람 때 더 절망적으로 다가왔다. 이 영화에서 카메라 앵글이 위에서부터 떨어져 땅에 뒹구는 장면, 땅에 뒹굴면서 하늘을 바라보는 무기력한 연출이 자주 나온다. 허무하다. 해준이 하-! 하고 쓴웃음을 순간 짓는다. 영원히 잊을 수 없을 사랑이었다는 것을 마침내 깨닫고 운명에 무너질 수밖에 없는 자신에 대해 알아버린 절망은 덤.


호미산 씬도 좋았다. 전등을 쓰고 있는 서래의 모습은… 영화 <더 씽>에서 오마쥬 한 것인가?


- 호미산에서 해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빛 번짐으로 얼굴이 없는 서래의 모습.

이때 무슨 일 일어날까 조마조마하고, 그리고 그때 서래의 대사와 키스신에서 그녀가 이 영화 안에서 꼭 죽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고… 느낌은 적중했다.

호미산 씬만큼 좋았던 것은 해준과 서래의 절 데이트 장면이다. 립밤 나눠 쓰는 장면을 보고, 아 정말 박찬욱 감독은 일상적인 물건으로도 에로티시즘을 표현할 수 있구나.. 1회 차 관람 때 너무 예쁘게 봤던 장면이었다.


- 그리고 고양이 밥 주면서 서래가 한 중국말을 몰래 통역해서 듣는 그 장면. 무미건조한 AI가 읊어주는 무시무시한(?) “그 친절한 형사의 심장을 내게 가져다줘” - 로맨스에서 스릴러로 찰나에 넘어갔다 돌아온 그 순간. 알고 보니 귀여운 혼잣말이었다.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누군가는 슬픔이 파도처럼 물밀듯이 오고, 어떤 사람은 잉크처럼 슬픔이 번지기도 해…”


나에게는 영화 엔딩이 파도처럼 밀려들어왔고 슬픔이 가슴 깊은 곳에 퍼졌다.

내가 했던 사랑, 줬던 사랑은 진짜 사랑일까, 어디까지가 사랑이었을까. 수많은 생각 속에 밤길을 걸어서 나와 상대방의 엇박자 숨소리만 느껴질 수 있는 시공간으로 걸어 들어가 보고 싶다 - 각본가와 감독의 마음도 들여다보고 싶었다.

아름다운 영화 감사합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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