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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선 Mar 27. 2021

네가 울면 무지개 연못에 비가 온단다

등을 밀어주는 슬픔들이 그네처럼 흔들리기를





네가 울면 무지개 연못에 비가 온단다.



유년 시절의 노래를 들으며 한때를 생각한다. 그림자를 구경하던 때가 있었다. 마주하면 등 같았고, 걷기 위해서는 자연스레 위아래로 흔들려야 했는데 그게 우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 나는 열일곱이었고, 당시의 빈곤은 친구들과의 모든 약속에 거짓을 달게 했다.


그때의 거짓은 말하자면 악의였다고 기억한다. 여유가 없어서, 우리가 함께 당도해야 할 그곳까지의 여비조차 없어서, 나의 빈곤이 이토록 짙어져서 우리의 약속을 취소해야 한다고 나는 말하지 못했으니까. 그 변명들에 어떤 선량함도 선의도 없이 간단하게 뱉곤 했다.


그런 일은 너무 일상이 되어버려서 슬프지 않았다. 친구와의 만남에 제사라든지, 집안일이라든지하는 변명들을 짜장면 한그릇을 시키는 가벼움처럼 쉽게 뱉었다. 너무 변명 같던 변명들에 많은 친구와 이별했고 그날의 친구도 그렇게 될 일이었다. 분명 그렇게 될 일이었다. 친구가 “민영아 이번에는 제발.”이라고 말하지 않았더라면. 제발이라는 말, 그 위에서 내가 어떤 서러움으로 울어버리지만 않았더라면.


다섯 식구의 막내로 다양한 사랑을 받았다. 그 빈곤 속에서도 나만은 지키려했던 가족의 노력을 나는 알고 있다. 나만 모르는 가족의 비애나 비참한 에피소드들도 즐비할 것이다. 나는 엎질러지면 쉽게 찢어질 가족의 마지노선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울어버렸고 설운 모습으로 반지하의 가족들에게 목격됐다. 그 중 누군가는 더 간절한 곳에 쓰여져야 했을 돈을 내게 건네주었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괜찮다는 말을 하면 도무지 괜찮아지지 않았다. 나는 괜찮은 모습을 위해서 그걸 받으며 민망한 웃음만 지어야 했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나온 나는 아무도 없는 놀이터를 찾아가 거기서 울었다. 그네는 가만히 앉아있어도 흔들렸다. 그림자는 앞으로 졌고, 등을 밀어주는 슬픔을 구경했다. 이후로도 때때로 울기 위해 그 놀이터를 찾아야 했다.


그날 이후 가족의 주변에서 어두운 감정을 내색한 기억은 없다. 무지개 연못에도 비가 올 테니까. 나를 따라 슬퍼질 세상이 있어서 눅눅한 사건을 마주할 때에도 건조한 표정들을 씹어먹어야 했다.


그래서 자취를 시작하며 가장 먼저 하고 싶던 일이 우는 것이었다. 누군가의 동정이나 위로, 기댈 수 있는 어깨 하나 없이 독립적으로 울어보는 것. 감정의 저장 없이, 저축된 우울과 절제, 도무지 괜찮아지지 않을 괜찮다는 말들도 없이.


자취를 시작한지 삼년, 작은 자취방은 펑펑 울어도 같이 울어버릴 사람이 없어서 좋은 곳이었다.


잘 힘들어하는 것도 쉽지 않은 세계라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퍽퍽한 삶은. ‘네가 울면 무지개 연못에 비가 온단다’라는 가사는 불행이라는 것이다. 두꺼운 외투를 입은 여름의 팔꿈치처럼 숨겨놓은 불안들은.


모두가 행복해지기를 위로하는 글을 쓰는 법은 모르겠다. 이제 엎질러진 내가 할 수 있는 위로같은 기도는 이것 뿐이다. 작은 방에서 집요하게 울고 나서도 세상이 멸망하진 않았다. 무지개 연못과, 도로와, 출입금지의 공사장들, 그 어떤 것도 따라 울지 않았다. 그러니 슬픈만큼 슬퍼하기를. 나의 하루와, 당신들의 하루에 등을 밀어주는 슬픔들이 그네처럼 흔들리기를.


비가 오는 날이다. 한때의 노래와 한때의 빈곤과 한때의 슬픔들이 바닥으로 추락한다. 그걸 멀리서 구경할 것이다. 함께 우는 일도, 괜찮다는 위로도 없이. 십년 전에 떠나보낸 표정을 거듭하는 오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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