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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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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중적인 성우 씨 Apr 09. 2019

엄마가 아니어서 다행이야

변함없는 명제


삼삼오오 모여 떠들며 남은 점심시간을 즐기고 있던 6학년 2반 교실이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남자아이들 서너 명이 자신의 자리로 가고 있던 소영에게 다가가 그녀의 왼쪽 가슴을 대놓고 만진 것이다. 당사자인 소영뿐 아니라 모든 아이들이 당황했다. 가슴을 직접 만진 창규는 교실 뒤편의 몇몇 남자아이들과 섞여 영웅이라도 된 듯 의기양양했고, 소영은 자리에 앉자마자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여자아이들은 울고 있는 소영을 보며 어찌할 바 몰랐고, 호기심에 들뜬 남자아이들은 창규의 주위를 둘러싸고 낄낄대기 시작했다.           


소영은 우리 반 여자 중 두 번째로 키가 큰 아이였다. 얼굴도 예뻤지만 발육이 보통 친구들보다 빨라 우리 반에서 제일 먼저 브래지어를 착용한 아이이기도 했다. 유치원 때부터 구체적인 성교육을 받는 요즘의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에게 같은 반 여자아이가 브래지어를 한 것은 전혀 특별한 일도, 호기심을 가질 일도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옛날 80년대의 아이들은 지금과 달랐다. 그 당시 브래지어를 한 여자아이들은 반에서 발육이 빠른 한두 명에 지나지 않았고, 그래서 그 아이들은 자주 남자아이들의 놀림거리가 되었으며, 자신의 정상적인 발육을 부끄러움으로 생각하곤 했다.                      


5교시를 하기 위해 담임선생님이 들어오셨다. 담임은 정년이 얼마 남지 않은 남자 선생님이었다. 오랜 교직생활의 반복으로 그에겐 젊은 선생님들과 같은 팔팔한 열정은 없었으나 딱히 트집을 잡을 만큼 학생들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한 번도 우리를 때리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으며, 그저 엄한 목소리로 나무라는 정도가 그가 주는 벌이었다.           

          

담임은 소영을 교단 앞으로 불러 세웠고, 왜 우느냐고 물었다. 담임이 자신과 성별이 다른 남자 선생님이란 게 이유였을까. 담임의 계속되는 채근에도 소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담임은 결국 울보 여자아이를 포기한 듯 자리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고, 그와 동시에 나는 손을 들었다. 그리고 일어서 담임이 있는 교단 쪽으로 걸어갔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림이 시작되었다. 그 몇 미터 안 되는 거리가 십리 길처럼 길었다. 머리카락 속으로 땀이 맺히기 시작했고, 내 몸의 모든 세포가 일어서는 기분이었다. 몇 발자국이나 걸었을까. 선생님 앞에서 울고만 있던 소영이 고개를 들어 나를 보더니 울음을 멈췄다.           

          

나도 내 발걸음을 멈추고 싶었다. 나는 왜 십리 길 같은 몇 미터를 굳이 가고자 하는가. 열세 살 내게 있던 정의감이, 나의 우정이, 나의 객기가, 나의 되바라짐이, 내게 내재되어 있던 어떤 종류의 허영이, 그 어떤 것이 내 발걸음을 멈추지 못하고 계속하게 하는 힘이었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저 해야 한다는 마음과 하지 말걸 하는 후회가 교차하며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내 운동화 밑 그림자가 되어 찍혔다.        

             

나는 결국 그 십리 길을 걸어 담임 앞에 섰고, 불과 15분 전 창규와 그 일행들이 소영의 가슴을 만진 일을 고해바쳤다. 고해바치다. 이 표현이 적당한가 모르겠지만 이렇게 쓴다. 어떤 단어로 그 일을 설명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여하튼 그때 나는 담임이 제대로 상황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교실이라는 이 공간 안에, 담임은 유일한 ‘어른’이었기 때문이다. 이건 남자아이가 여자아이의 필통을 던져 아끼는 샤프 정도를 부러뜨린 경우와는 다른 일이다. 남자, 여자, 편을 나누어 장난 같은 말싸움을 하다 말 일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건 그때 아무 말 없이 내 옆에서 울고 있는 소영의 친구로서, 또 같은 여자로서, 나는 그게 우정이라고, 정의라고 생각했다. 나는 담임이 그 남자아이들 뿐 아니라 그걸 보며 함께 낄낄거렸던 다른 남자아이들까지도 호되게 나무라 주기 바랐다. 무엇보다 이런 일은 다시는 반복되면 안 되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내가 친구를 위한다고, 정의감에 한 고자질(남자아이들은 단 세 음절, 고자질이라고 말했다)은 엄청난 후폭풍이 되어 눈앞에 펼쳐졌다. 담임은 큰 소리로 남자아이들의 이름을 호명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나온 창규가 채 교단에 올라서기도 전에 60명의 눈앞에서 그 검고 두껍고 커다란 출석부로 매질을 하기 시작했다.       

              

눈앞에 펼쳐진, 태어나 처음 보는 폭력이 내 몇 마디 말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데도 시간이 걸릴 만큼, 그 폭력의 수위는 그 나이 우리들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보고 있던 내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처음 생각했던 정의감이란 단어는 머릿속에서 산산이 깨져 흔적도 없어졌다. 난 줄곧 이게 나로 비롯된 일인가 생각했다. 나 때문인가, 내가 잘못한 건가.           


그 당시 우리에게 제대로 된 성교육이 전무했듯 아마 교사인 담임 역시 이런 상황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이 없었던 것 같다. 담임도 처음 겪는 일이었을 것이고, 환갑이 다 된 그가 교직생활을 하며 가장 언짢은 일이었을 것이고, 그 역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을 마주하고, 감당하기 힘든 당황스러움과, 다신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교사로서의 사명감과, 어리기만 한 놈이 한 반의 여자아이에게 그런 몹쓸 짓을 했다는 괘씸함이 뒤섞이자, 담임으로서 응당 해야 했을 '지도'는 자신도 미처 계산하지 못한 방향으로 폭력이 되어가고 있었다. 어느새 남자아이들 중 상당수가 울고 있었다. 맞은 아이들뿐 아니라 그들과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출석부 세례가 끝나고 담임의 훈계가 시작되자, 남자아이들의 시선은 모두 내게로 와 꽂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시선이란 게 칼보다 날카롭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정수리부터 운동화 끝까지 순서 없이 찔러대던 시선의 칼끝은 두근대던 내 심장을 부추겨 더 빨리 뛰게 했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확실한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몸이 떨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야. 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어.'

나는 태연한 척 등을 꼿꼿이 세우고 고개도 쳐들었지만, 내 이성과는 반대로 사실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계속 가빠지는 내 심장소리가 다른 애들에게 들릴까 걱정되었고, 점점 달아오르는 내 얼굴을 누가 눈치챌까 조바심이 났다.       




그 후로 며칠이 지났다. 놀라운 것은 6학년 2반 교실의 이 끔찍한 폭력사태의 시발점은 소영의 가슴을 주무른 창규가 아니었다. 처음 봤던 담임의 매질과, 여전히 얼음 같은 이 공기는, 그 시작은, 남자아이들이 단 세음절로 압축한 나의 고자질이 시작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생각은 흡사 “고자질만 하지 않았으면, 창규가 소영의 가슴을 만지는 일 따위는 없었을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명제로 바뀌어갔다.          


고자질이란 무조건 ‘나쁜’ 행동이라고 배우던 시절이었다. 고자질의 역사가 식민시대와 전쟁과 민주화운동을 거치며 이 나라 국민에게 그렇게 각인되어선지, 그렇게 가르치기도 했다. 나 역시 그 이전까지 그렇게 생각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고자질을 했다. 울고 있는 친구 소영이를 위해, 또 나와 우리 여자들을 위해. 여자의 가슴을 만지고 주무르며 재밌다고 낄낄거리는 남자애들은 우리 같은 또래와 ‘싸울 게’ 아니라 어른의 제대로 된 ‘훈육’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영이 아무도 모르는 폐쇄적인 공간에서 창규에게 그런 일을 당한 거라면, 그녀가 이 일을 여러 사람 앞에 공개하기 꺼려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겠으나, 소영은 그날 60명의 아이들이 다 보고 있는 교실 한가운데에서 그 일을 당했다. 나를 위한 고자질이 아니었고, 그 일로 내게 어떤 혜택이나 대가도 없는 일이었기에, 무엇보다 소영뿐 아니라 누구든 그 대상이 될 수 있는 모든 여자아이들을 위한 것이었기에, 나는 그게 우정이라고, 정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 반 여자아이들은 약속한 듯 모두 침묵했다. 당사자인 소영이조차도 교단에서 자리로 돌아가며 내 손을 꼭 잡았던 게 전부였다. 늘 나와 함께 밥을 먹고, 함께 화장실에 가며, 머리를 맞대고 서로의 사소한 비밀을 나누던, 이번 학년 내내 나와 함께 보낸 내 친구들이, 그 많은 여자아이들이 말이다. 남자아이들이 자신들만의 의리로 고자질쟁이 여자아이를 처단하겠다며 몰려다닐 때, 여자아이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고, 나를 외면하진 않았지만 지지하지도 않았다.            

         

아마 모두 어렸던 그때 이런 일에 함께 휘말리는 게 두려웠을지도, 어쩌면 여자아이들 역시 그냥 가만히 있었으면 평화로웠을 것이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안에서 끝까지 내 곁을 지키고 지지해주던 희주 외에는 누구와도 가깝게 지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겨울 방학을 한 달 남겨두고 나는 전학을 가게 되었다.       


교단에 서서 마지막 인사를 하는데, 친구를 위해 하교 길에 나를 처단하겠다고 앞장섰던 기태란 놈이 들으라는 듯  소리 내어 말했다.

제대로 한 번 패주고 보냈어야 되는데...”

몇몇 남자아이들이 킥킥거렸다.

동시에, 그 한마디로 비로소 내가 정의로웠다고 생각하고 한 일이 정의로운 건가, 잘못한 건가에 대한 내 고민은 거기서 끝이 났다. 저 정도 수준의 아이들을 두고 이런저런 생각을 한 자체가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에게 더 이상 미안한 것도, 좀 더 다른 방법으로 그 일을 해결할 순 없었을까 하는 고민도, 더 신중했어야 했나 하는 미련도 끝이 났다.              


그래, 나이를 열세 살이나 먹고도 뭐가 먼저인지 모르고, 뭐가 잘못인지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아이들아, 그렇게 살아라. 나중에 커서도 여자 가슴이나 만지고 주무르며 낄낄대면서. 누가 경찰에 신고하면 친구를 위해 우정을 위해 정의롭게 그 신고자의 집 앞을 지키고 섰다가 함께 가서 패주고, 독립운동이라도 한 양 자랑스러워하며 부디 그렇게 살아라.


나는 갖은 생각으로 두 달간 깨끗이 씻기지 않았던 두통을 비로소 접었다.        




'선택', 사람에게 주어진 형벌 중 가장 잔인한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열세 살에  내가 한 선택이 옳은 것인지 열심히 고민했었다. 그때 내가 손들고 나가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그때 우리 반 여자아이들이 나와 같이 일어나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그때 담임이 유일한 어른으로서 서툴지 않게 제대로 대처했었다면 어땠을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어른이 될수록 나는 더 이상 그 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정말 이게 옳은 것인지 보다 내가 꼭 해야 하는 일인지에 대한 고민이 더 커지기 시작했다. 선택이란 형벌을 비켜가기 위한 고민과 꼼수만 늘어갔던 것이다. 나는 더 이상 선택의 기로마다 옳고 그른 것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난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고,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10년의 회사생활을 거치며, 정의에 대한 내 생각은 더욱 확고해져 갔다. 높으신 분이 까라고 하면 까는 게 룰이었고, 정의를 앞세워 반기를 드는 놈은 상식이 없는 놈이 되었다. 관습은 법보다 우선되었고, 원칙은 오직 그 안에서만 만들어졌다. 정의, 직장생활 10년 동안 그 단어를 입에 담은 적이 있었던가? 어쩌면 그 단어는 남몰래 사전을 찾아 그 뜻을 알아만 보는 것도 안 될 단어였다.        

               

그래서 때때로 나는 내게 아이가 없는 것에 감사하곤 한다. 시험관 시술로도 아이를 얻지 못한 내게 어쩌면 아이가 없는 것은 불행이 아니라 다행인 건지도 모른다고.      

내가 입 밖에 내어 가르친 적도 없는데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간교함을 가진 아이가 태어나면 어쩔 뻔했나. 

내 몸 안에 나도 모르게 정의롭지 못한 세포들이 축적되어, 그 세포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 간사함으로 교활함으로 비겁함으로 세포분열이 되고, 그 세포들이 모여 몸을 이루고 있는 나에게서 나온 내 딸은 ‘모태 간사’를, ‘모태 비겁’을 태생적으로 가지고 태어났으면 어쩔 뻔했나. 

아이에 대한 죄책감과 끊임없이 세포 분열되었을 내 몸이 소름 끼치게 느껴져도 난 아이에게 정의에 대해 가르칠 수 없을 것이다.        


그 열세 살 이후 나는 이게 정의가 아니냐고 쉽게 반문하지 않았다. 이게 옳은 것 아니냐고 설득하지 않았다. 그 열세 살 이후 나는 옳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하지 않은 적 많았고, 못 본 척 눈감고 오로지 내 안위만 걱정했던 적 많았다. 어떻게 자식에게 나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너는 하라고 가르치겠나.     

                       



▲에디터스 초이스 190319 / 오마이뉴스


며칠 전, 신문기사에서 자신이 경험한 검찰 내 성폭력을 고발한 서지현 검사의 SNS에 관한 기사를 보았다.      


“김학의, 장자연 사건 모두 주임검사가 성희롱 내지 성추행으로 검찰을 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변호사를 잘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검찰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일부는 그들이 그렇게 나간 것을 안타까워한다”                    


한편에선 우리나라 미투 운동의 ‘디딤돌’이라 불리지만, 한편에선 단 두 글자 ‘관종’으로 불리는 바로 그 여자 하나 때문에 훌륭하신(?) 분들이 검찰을 나간 건 여전히 안타까운 일인 것이다. 조직은 아랑곳없는 관심종자가 입만 다물었으면, 조직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게 자명한데 말이다. 30여 년이 지났음에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같다.     


아이들과 여성을 성추행하는 사건들은 해마다 늘어가고, 상당수의 아이들은 여전히 그걸 자신의 잘못으로 알고 있거나,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며 자라고 있다. 성인이 된 여성 역시 어떤 일을 당하든 침묵을 깨고 나서기란 쉽지 않다. 우리 사회는 자신에게 피해가 오거나 안 좋은 방향으로 휘말리게 될까 두려워 보고도 침묵하는 것으로 지난 세월을 지나왔다. 잊고 있던 열세 살의 기억이 이렇게 세세히 복기될 수 있었던 것은, 그때와 똑같은 일이 지난 30년간 수없이 반복되고 있는 걸 내가 여전히 목격해 오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요즘 같아선 열세 살 밖에 안됐던, 어렸고 무지했던 그 남자아이들에게 퍼부은 내 머릿속 저주가 너무 가혹한 것은 아니었는지 생각하기도 한다. 열세 살은커녕 첫사랑에 실패만 하지 않았더라면 열세 살 짜리 손주가 있을 법한 나이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변함없이, 이 사회를 관통하는 명제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누군가 쓸데없이 정의롭지 않았으면, 누군가는 같은 반 여학생의 가슴 따위 만지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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