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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듀이 Feb 09. 2020

퇴사해도 별 일 안나네

큰 일 나지 않는 하루하루


가고 싶은 길을 갈 뿐. 요숨.




양 방향 1차선 도로를 위에서 내려다보면, 끝없이 이어지는 자동차 행렬이 마치 어릴 때 까먹던 자동차 모양의 초콜릿처럼 보인다. 그 귀여움에 도취되어 하염없이 창 밖을 관망하다 보면, 이 행렬 맨 앞에 선 자동차 주인의 성격이 도로에 주르륵 흔적으로 남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차들은 가고 싶은 길을 갈 뿐이다

홀로 거침없이 달려 뒷 차를 따돌리고 휙 사라져 버리는 프로 드라이버가 있는가 하면, 매 순간마다 브레이크를 빈번히 밟아대서 자연스레 뒤따르는 차들의 속도마저 늦춰버리는 겁쟁이 드라이버도 있다. 얼핏, 내 시야 제일 끝을 달리는 저 선두 한 대가, 뒤따르는 행렬의 속도와 방향을 모두 결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군가는 추월을, 누군가는 샛길을, 누군가는 앞차의 속도가 편안해 계속 그 길을 따라 달리는 것을 택하고 있다. 주변이 모두 한 방향으로 향하는 압박 속에서 빠져나와 멀리서 보면, 그냥 제 갈 길 가는 행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 차들은 가고 싶은 길을 갈 뿐이다.

나에게는 잠시 숨 가빠졌던 이 길에서 잠시 속도를 줄이고 에너지를 채운다고 해도, 지도를 다시 한번 살피다 이 길이 아니라며 유턴을 해 다른 길로 들어선다 해도, 나는 내 방식대로 달리면 그만이다.


퇴사해도 괜찮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하는 하루하루를 쌓다 보면,
정말 괜찮다는 사실을
타인에게도 증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한 달은 무조건 쉬고 놀아"
"넷플릭스부터 싹 몰아서 보면서 머리를 비워"
"낮에 전시회만 돌아다녀도 너무 좋겠다, 전시회 보고 카페 놀이해"
"아직도 비행기표 안 샀어?"

쏟아지는 한국 식 '퇴사 후 문화'를 뒤로 하고, 나는 다음날도 그대로, 천천히, 나다운 저속 일상을 이어갔다. 멈추는 게 아니라 천천히라도 이어가는 것이 나에게는 훨씬 더 중요했다. 퇴사해도 괜찮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하는 하루하루를 쌓다 보면, 정말 괜찮다는 사실을 타인에게도 증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면에서, 언제든 도움닫기로 사용할 수 있는 여러 지점을 삶에 심어둔 것, 혹은 발견한 것은 매우 든든한 일이었다. 내게는 교환학생으로 미국에서 보낸 1년의 시간이 바로 그때였다. 가족, 학교, 오래된 친구들, 취업... 삶의 모든 형태를 규정하던 모든 것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덩그러니 서서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거렸던 시간, 스스로를 '누구의 무엇'이 아닌 하나의 낯선 주체로 인식하기 시작한 순간들, 스무 해를 살고 나서 스물 하나가 되었을 무렵, 인위적으로 내게 익숙한 모든 것이 떨어져 나간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나는 내가 누구인지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자신조차도 낯설게 느껴지고 어리둥절했던 그때, 가려진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으로 뒤섞인 그 감정, 퇴사 직후의 내 상태와 꽤 유사했다.


'재미있고 열정 터지던 그때의 나'가
앤의 머릿속에는 아직 살아있었다.

한국인이 몇 되지 않는 그 학교에서 나는, 나보다 두 살 어린 '앤'이라는 친구를 만났다. 고등학생 때 미국으로 건너와 이 곳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낸 앤은, 당시 내게는 한국어를 하는 외국인처럼 느껴졌다. 독립적인 성격과 사고방식, 제 머리를 스스로 자르는 행동력(당시 꽤 충격이었다!), 소설을 좋아하고 그림을 자주 그리다가는, 전공으로 그림을 선택해버렸다는 친구(취업을 목표로 전공을 선택한다는 것 자체가 '없는 세상' 이야기 었던). 아무데서나 잘 자고 아무거나 거리낌 없이 잘 먹고, 그러나 본인만의 기준 만은 뚜렷한 강단 있는 친구가 바로 앤이었다.


선생님이 되고 싶었지만 임용고시의 문턱과 부모님의 취업에 대한 압박으로 간호대학으로 진학한 친구의 이야기에 같이 마음 아파했던 나에게 앤의 존재는 꽤 충격적이었다. 우리는 너무도 달랐지만 한국이라는 공통점을 기반으로 자연스레 스며들었고, 천방지축 엉망진창 행복한 일 년을 보냈었다.

퇴사 다음날, 나는 오랜만에 앤을 만났다. 그냥 만나야만 할 것 같았다. 별 생각 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일상을 즐겁게 쌓아갔던 그때의 감정으로 돌아갔다. '재미있고 열정 터지던 그때의 나'가 앤의 머릿속에는 아직 살아있었다. 과거, 현재, 미래. 이런 대책 없고 휘발성 짙은 이야기를 하는 내내, 나는 앤 안에 잠든 과거의 나로부터 다시 힘을 얻었다.

이제 남은 것은 퇴사하면 큰 일 나는 줄 알았던 나에게 아무 일도 나지 않는 하루하루를 피타고라스 마냥 증명하는 일뿐이었다.


천방지축 엉망진창 행복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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