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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듀이 Aug 10. 2020

혼자 하는 백오피스

스타트업 잡부로 살다 보니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그래, 너는 거기서 무슨 일을 해?"
"어.. 일단 재무회계랑.. 기획... 인사.. 세무... 총무.. 가끔은 IR.. 법무... 종종 번역..?"
"ㅇ.....?"

어쩌면 내 일은 DD. Dㅏㄱ치면 Dㅏ한다 일지도 모르겠다. 회계와 홍보에 업무 베이스를 두고 있던 나는 전 회사에 비해 인력 규모가 1%도 안 되는 지금 회사로 출근하면서 경영지원과 사업기획에 모두 발 담그게 되었다. 일단 지금 이 일을 담당하는 것 같은 사람이 없으면 그건 내 일이라고 보면 된다.


Dㅏㄱ치면 Dㅏ한다

입사하면서 내 4대 보험 취득 신고를 스스로 했다. 내 급여를 내가 작업해 지급하고 원천세도 내가 납부한다. 분기마다 부가세를 신고하고, 반기마다 근로소득 지급명세서를 제출한다. 투자유치 진행에 따른 자료를 함께 만들고, 그에 따른 지분구조를 설계한다. 투자금의 성격에 걸맞게 정관을 바꾸거나 회사 내부 사정을 반영하여 등기도 변경한다. 수익 파이프라인 다각화를 위해 신사업에 대한 검토도 진행한다. 그 외에도... 일단은 소방관처럼 그 날 터진 이슈를 해결한다. 이중 대다수가 회사를 옮기고 새로 하게 된 일들이다.

감사하게도 이 과정에서 주변 지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는데, 역시 회사는 똥일지언정 사람은 남는다는 말을 두 번 세 번씩 끄덕이고 실감하게 된다. teamviewer를 통해 내 화면을 보며 직접 가르쳐주는 친구들, 답답하면 직접 만나서 일에 대한 팁들을 전해주는 사람들 덕에 스타트업 잡부로서의 삶도 어느 정도 안정세를 찾아간다. 초기 멤버로 합류한지라 일을 알려줄 선임은 없지만 그동안 내 곁에 머물러 준 주변 사람들 덕에 여차저차 회사 살림을 꾸려나갈 수 있게 되었다. 언제나 감사할 일이다.

원래 새로운 일을 궁금해하고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하고자 하는 성격이라 지금까지의 과정이 그렇게 힘들지만은 않았는데, 외려 주변의 많은 걱정을 받았다. 너 괜찮냐고. 제대로 가고 있는 것 맞냐고. 그럴 때면 나도 스스로에게 자문해본다. 대형 시스템을 벗어나 작은 스타트업으로 옮겨와서 네가 하고 싶었던 것이 이게 맞냐고.


다하다 보니 다하게 되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것 같다. 모르는 것들로 가득 채워진 하루하루를 받아들이는 것이 무섭고 힘들지만 새로운 자극을 받는다는 것 자체에는 만족감을 느낀다. 회사생활 7년 차, 담당 업무에 대해서는 빠삭해도 회사가 어떤 원리로 굴러가는지 실감할 기회가 없었다. 지금 이 스타트업에서 나는 그 구조와 원리를 생생히 보고 있다는 것에 큰 가치를 느낀다. 그러나 가끔씩 "적은 인력"과 "신사업"이라는 말이 꼭 "내가 생각했던" 스타트업을 말하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스타트업에 대한 자그마한 환상을 가졌던 과거의 내 자신에게 때려 맞을 때가 있다. 그럴 땐 지금 이 경험은 어디서도 돈 주고 못한다는 생각으로 버텨본다. 그러다 보면 또 사업의 모양은 바뀌어있고, 나는 그에 맞춰 나를 유연하게 사용하고 있다.

너무 슈퍼 제너럴리스트가 되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함이 엄습할 때도 있지만, 다른 사업체의 한 달이 이 곳의 하루라고 생각하며, 이 하루하루를 귀중하게 살아보는 중이다. 나는 지금 사람과 자본이라는 동력을 활용해 이 무거운 사업체를 조금씩 옮겨나가고 있다. 투자처에 잠깐 들러 기름을 조달하는 것도 잊으면 안 된다. 제 때 통행세도 내며 의무를 다해야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리얼 닥치면 다하다 보니, 이직 반년 만에 내가 많이 자랐다는 걸 스스로 실감할 수 있을 정도다. 현상을 보는 시선의 zoom in & out이 보다 자유로워졌고, 어떤 일이든 그 일에 접근하고 해결하는 '방법'에 대한 트레이닝이 꽤 되었다. "잡부로 살다 보니 오히려 어느 일이든 가능해졌다"는 생각이 든달까.

그런 의미에서 오늘도 긍정적으로 출근 준비를 해볼까.



잼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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