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by 제이앤

한참 수업을 하는 중이었다. 중년의 남성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보통 아이를 데리러 오는 경우라면 문만 열고 아이 이름을 밝히는데 냅다 들어오셔서 학원을 둘러보시는 경우라 나도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몇 초간 나도 모르게 담은 것 같다. 일단 오셨으니 자리를 안내해 드리고 하던 레슨을 마무리하고 상담 테이블에 앉았다.


"제가 악기를 엄청 잘 배우거든요. 다른 악기는 다 하는데 피아노는 안되더라고요. 그래서 은퇴한 김에 피아노 한번 배워보려고요."

입시생 때부터 선생님이 자리를 비우실 때마다 나에게 학원을 맡기셨고 그 뒤로 강사로 일을 다닐 때마다 원장 역할을 맡아야 하는 학원에서 일을 했기에 상담이 어렵다고 느끼지 않았는데, 꽤나 신선하고 당황스러운 첫 등장과 첫마디가 아닐 수 없었다.


성인 개인 레슨도 꾸준히 해왔고 학원에서도 성인반을 수업하고 있지만, 보통의 경우 성인 수강생들은 오래 수업을 이어가지 못했다. 대부분 직장을 다니거나, 집안일과 육아에 치이다 '그래, 나도 음악을 하고 싶었지.'라는 마음으로 학원을 등록했다가 현실의 부담에 다시 돌아가게 되기 때문이었다. (가장 오래된 수강생은 교대근무인 소방대원이지만, 보편적인 경우로 말할 수 없기에 제외!) 여유가 없는 것을 알기에 성인 수강생을 만나면 최대한 많은 것을 알려주고 싶다. 하지만 이렇게 온 힘을 다해 수업을 준비하는 마음이 무색하게 짧은 메시지나 말 한마디 없이 수업이 종료당하는 일이 반복되다 보니 오래 배울 의지가 보이는 수강생이 아니면 시작해서 상처받지 말지, 하는 마음이 드는 것도 솔직한 마음이 되었다. 이렇게 많은 생각타래들이 머릿속을 한 바퀴 돌았고 비로소 마음먹고 이야기했다.


"저는 취미로 배우려고 오시는 분들도 대충 가르치지 못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진도도 쉽게 나가지 않을 거예요. 피아노는 곡을 연주하기 위해 배울 것이 특히 많은, 그래서 오래 걸리는 악기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모든 것들을 감당할 마음이 든다면 다시 오세요."

용기였을까, 회피였을까. 진심이 아닌 것은 아니었다. 긍정적인 이야기만 건네는 평소의 나와는 달랐지만 말이다.


일주일 넘은 날들이 지났을 것이다. 그분이 다시─처음 모습 그대로 아무 연락 없이─학원 문이 벌컥 열렸다.

"저 피아노 배울래요. 가르쳐주세요."

코드반주를 당장 배우고 싶어 하셨지만 바이엘 4권은 끝내야 코드를 가르쳐드리겠다 했다. 세상에, 무슨 명창의 소리 전수도 아니고 이렇게나 깐깐한 선생이라니. 내가 수강생이었다면 콧방귀를 뀌고 도망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유 없는 으름장을 놓을 만큼 거만을 떨 성격이 안된다. 기초가 제대로 쌓지 않을 거면 유튜브보고 한곡 외우는 게 더 빠르고 나을 것이다. 기왕지사 나를 만났으니, 스스로 악보 보는 법을 배우셔야 한다. 바이엘에서는 정말 많은 것을 배운다. 높은 음자리표와 낮은음자리표에서 계이름을 읽는 법, 음표와 쉼표의 박자를 세는 법, 손가락 번호에 맞춰서 연주하는 법, 이음줄과 스타카토에 따라 손목을 이동하고 손끝으로 힘을 전달하는 법, 여러 가지 음악 기호를 보고 악보에 맞게 손과 몸으로 표현하는 법 등 이루 말할 수없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교재다. 하지만 그만큼 지루하고 멜로디가 아름답거나 재밌지 않다. 실력이 성장하는 것이 잘 와닿지 않는다. 피아노는 정말 어려운 악기다.

아이가 바이엘을 연습하다 지칠 때면 나는 열 장 정도 악보를 앞으로 넘겨 보인다. "예전에 이거 칠 때 막막했던 기분 기억나? 그땐 이걸 어떻게 치나 싶었지? 그런데 지금 보니 어때? 너무 쉽게 칠 수 있는 곡이지? 앞으로 칠 곡도 이렇게 될 거야. 새로운 걸 배운다는 건 지금까지 배운 걸 잘해왔다는 거니까. 선생님은 네가 분명히 또 잘 해낼 거라고 믿는데. 너도 스스로를 믿고 도전해 볼 수 있겠지?" 이렇게 대화를 나누고 난 후에 연습을 포기하는 아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성인의 경우 나의 구슬리는 말보다 본인 생각의 비중이 더 크기 때문에 이러한 고비 이후에 어떤 결정이 내려질지 예측할 수 없었다. 하지만 제대로 배우지 않을 거면 시작하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은 선생과 바이엘 4권을 공부하는 시간 동안 은퇴한 수강생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 지루한 레슨을 하며 늦은 적도, 연습을 게을리 해온 적도 없었다. 피아노를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아 손가락이 뻣뻣해 잘 돌아가지 않는 것도 연습 부족이라며 더 연습해 오시라 돌려보내는 빡빡한 수업이었지만, 내가 처음에 뱉은 말대로 다른 사람의 연주에 맞춰가면서 본인도 즐기며 연주할 수 있도록 가르쳐 드리고 싶었다.


바이엘 3권 마지막 곡쯤을 배울 때였을 것이다. 연습이 많이 필요한 곡이라 지난주 두 번의 수업에도 넘어가지 못한 곡을 결국 숙제까지 내드리고 다시 만난 월요일이었다. 학원 문이 열리며 "주말이 참 길더라고요." 말이 먼저 들어왔다. 주말이 길었다는 게 무슨 뜻일까?

"연습하는 거 많이 힘드셨죠?" 했더니 돌아오는 대답에 나는 환호성을 지를 뻔했다.

"아니요, 빨리 레슨 받고 싶어서요. 저는 이 시간이 음악치료받는 시간이에요.:


세상에나, 빨리 레슨을 받고 싶으셔서 주말이 지루하게 느껴졌다니. 그리고 이 시간이 음악으로 마음이 치유되는 시간이라니! 이 얼마나 가르치는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인가! 밀도 있게 가르쳐 드리는 것이 혹여 나의 욕심은 아닐까, 서로의 속도가 달라 지치시진 않을까 피아노에 비치는 표정을 옆 눈으로 살펴가며 수업하던 나는 비로소 안도할 수 있었다. "정말 감사해요. 제가 진짜 잘 가르쳐드릴게요." 그 후로도 나는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 교재에서 배울 수 있는 모든 것을 알려드리려고 애썼고, 그분은 좀 더 앞서 내드리는 과제를 갈수록 더 완전히 소화시켜서 피아노 앞에 앉으셨다.


레슨을 시작한 지 세 달이 되었을 때, 드디어 은퇴 수강생은 코드 연주를 시작했다. 스케일 연습과 응용코드, 전위폼까지. 악보 그대로 치는 법이 아니라 악보에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다. 이제 수강생 앞에 놓인 악보에는 높은 음자리표에 그려진 멜로디와 알파벳뿐이었다. 코드반주 레슨은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수강생 입에서 자신 없는 목소리가 나왔다.

"이거 제가 할 수 있을까요?" 그분이 처음으로 약한 모습을 보였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의지가 약한 성인을 가르치는 것은 피아노가 지겨워진 어린이들을 가르치는 것과 차원이 달랐다.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데 끌고 나가기가 거의 불가하기 때문이다. 심사숙고한 본인의 결정을 존중하는 게 첫 번째이고,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없으면 아무것도 가르칠 수 없는 것이 두 번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엔 처음으로 흔들리는 의지를 내가 거부하기로 했다.


"죄송하지만 이번엔 제가 포기를 못하겠어요. 선생님이 배우시는 속도도, 지금까지 선생님이 배우시는 속도도, 지금까지 열심히 해내오신 것도. 제가 아까워서 포기 못하겠어요. 잠깐만 눈 딱 감고 버티시면 분명 다른 레벨로 올라가실 거예요."


이후 수강생은 놀랍도록 단기간에 코드반주에 감을 잡았고, 칼립소 리듬과 아르페지오 주법을 익혔다. 느린 곡 연주에 페달링을 연주하고는 자신 맘에 꼭 들게 연습을 마쳐 온 어린아이처럼 뿌듯하고 당당한 눈빛을 보냈다.


"이렇게 재능이 있으시다면, 어릴 때부터 음악 배우고 싶으셨을 것 같은데요?"

"엄청 하고 싶었죠." 대답하는 수강생은 음악을 하고 싶어 학원을 기웃거렸던 어린 시절의 모습으로 내 앞에 마주해 있었다.


잘했다는 칭찬대신 어린 시절 마음에 질문을 던지는 이유는 자녀를 가르치기 위해 상담을 온 보호자나 수강생 본인에게 늘 비슷한 말을 듣기 때문이다. "저도 어릴 때 배우고 싶었거든요." 사람들은 모두 음악을 좋아하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그 마음이 흩어지지 않고 뿌리를 내리면 언젠가 그 꿈은 마음을 두드리나 보다. '사실 나도 음악 하고 싶었었거든요.'

그 마음의 두드림을 외면하지 않고 용기 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은퇴 성인 수강생은 지금 그 꽃을 틔우기 시작했다.


은퇴란 직임에서 물러나거나 세속의 일에서 손을 떼고 한가히 산다는 뜻이다. 직임에서 손을 떼고 한가히 살아갈 시간이 되었을 때, 그 여유를 묻어두었던 꿈을 소박히 꽃 피우는 시간이 시작된 것이다. 그 시작이 얼마나 아름답고 향기로운지, 어릴 때 못 가본 음악 학원애 스스로 들어가 어린이들 사이에서 연습하고 레슨 받는 그 용기가, 은빛 흰머리와 세월을 따라 길이 난 주름에 덧입혀 얼마나 아름답게 빛나는지 알고 계실까? 뛰어난 성공을 이룬 것만큼이나 성실히 임기를 마쳐 은퇴를 맞으며 이후의 시간을 더욱 사랑하고 보살피는 모습이, 아직 인생의 큰 그림을 보지 못해서 앞만 보고 달릴 수밖에 없는 젊은이들에게 얼마나 큰 격려와 응원이 되는지 느껴지실까?


"앞으로 더 잘하게 되실 거예요. 오늘도 너무 잘해오셨고요. 다음번엔 더 멋진 오른손주법을 알려드릴게요." 허리 숙여 배웅하며 오늘 수강생의 망므에 묻어두었던 음악의 꿈이 꽃피는 것을 함께 목격하게 해 주신 감사를 전한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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