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치는 일이 커리어가 될 때
현장에서 일하며 사소한 업무 하나하나가 커리어가 되는 과정을 경험했다. 테이블을 닦고, 재고를 세고, 고객 컴플레인을 처리하던 그 '짜치는 일'들이 쌓여 어느새 나는 팀을 이끄는 자리에 있었다.
예전에 나의 상사와 이야기를 하다가 그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신뢰는 먼저 주어져야 한다고.
리더가 팀원들을 믿어줘야 그것을 발판삼아 훨훨 날아다닐 것 아니겠냐며.
나는 잘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그러니 나를 먼저 믿어달라는 뜻이었다.
리더의 무조건적인 신뢰가 팀원을 편안하게 만들고, 그 편안함이 결국 더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고 믿었다.
그때 그에게 돌아온 대답은 단호했다.
신뢰는 얻어지는 것이다.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무조건 믿기만 하겠느냐.
처음 들었을 때 그 말은 어딘가 차갑게 들렸다.
마치 어떤 일정한 조건을 통과해야만 좋은 관계가 시작될 수 있다는 통보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막상 내가 리더가 되고 나니, 과거에 내가 그토록 바랐던 것을 팀원에게 주지 못하는 순간들이 있었다.
최종적으로 책임을 지는 자리는 생각보다 녹록치 않았다. 많은 부분들을 숫자로 보여줘야만 했었다.
결과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팀의 것이 되고, 팀의 결과는 다시 나의 판단으로 귀결된다.
과거에 그렇게 신뢰를 외치던 내가 어느새 팀원에게 조용히 증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결과로 보여줘야만 해.”
리더가 믿어주면 자연스럽게 팀원이 잘하게 되는것인지, 팀원이 결과물로 보여줘야 리더가 신뢰하게 되는것인지, 무엇이 먼저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어쩌면 사람은 그냥 무조건 믿어주는 리더보다 성장시켜준 리더를 더 오래 기억하지 않을까.
‘그 사람 때문에 내가 더 큰 사람이 되었다’ 혹은 ‘내 커리어에 한 획을 그었다’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그런 리더.
사람이 일을 하다 보면 실수도 하고, 위축도 되고, 자기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분명히 온다.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고, 깊다.
이때 리더가 “증명해봐” 라고 하는 것과 “배울 수 있게 해줄게” 라고 하는 것에는 확연한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전자는 결과를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한다. 후자는 가능성을 기준으로 사람을 바라본다.
결과만 요구하는게 아니라, 내가 어떤 방식으로든 경험을 통해 배우고 성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상사를 결국에는 신뢰하게 되는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내가 앞으로 누구를 따르든, 어떤 규모의 팀을 이끌게 되든, 혼자 일하든..
그것과 상관없이 사람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ㅡ 그러니까 기계적으로 성과만 추구하는 관리자가 아니라, 사람의 불완전함을 이해하고 성장을 돕는 사람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거라는 생각을 해본다.
기본값은 신뢰로 두되 방임하지 않고, 기준은 분명히 하되 위축시키지 않으며, 실수를 허용하되 반복을 방치하지 않는 사람.
사람에게 의미를 남기는 리더.
그런 사람이 되면, 서로에게 신뢰는 증명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따라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