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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 Gray Nov 28. 2020

문과생들이 하는 일

장애의 정의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들

2018년도 즈음인가, 혜성처럼 나타난 '김박사넷'이라는 사이트는 부당한 대우를 받고도 딱히 하소연 할 곳이 없는 수많은 석박사생들의 신문고와 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석박사생들이 교수를 평가하고, 랩실을 평가하게 함으로써, 늘 을의 입장으로 살아야했던 이들에게 김박사넷은 처음으로 사소하지만 통쾌한 권력을 쥐어줬다. 나 역시 그 중 한명으로서 김박사넷이 긍정적인 공론(公論)의 장이 되기를, 그리고 이런 생각들이 모여 암암리에 일어나는 악습들이 조금씩이나마 개선되기를 바랬다. 


최근에서야 다시 들어가본 김박사넷은 초기에 내가 알던 목적과는 완전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지금의 김박사넷은 그냥 대학원 서열 세우기, 해외박사 국내박사 우열가르기 등 또 다시 무의미한 공론(空論)을 반복하는 여느 인터넷 사이트와 다를 바가 없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왜 이런 일이 자꾸 반복될까를 생각해봤다. 익명에 기대어 갈등을 조장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런 일이 자꾸 반복된다는 것은 분명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내 결론은, '먹고 살기 힘들어서 그렇다' 였다. 정확히 말하면, 어느 정도 먹고 살 수준의 벌이가 '안정적으로' 보장이 되는 직업을 구하기가 힘들어서, 그 괜찮은 소수의 자리를 두고 무수한 사람들이 경쟁을 해야하니까 그런게 아닐까 싶었다. 그래서 자꾸 순위를 매기고, 우열을 가르고 그러는 게 아닐까 싶었다. 대학원은 물질적 보상은 포기할 수 있는 사람들, 연구가 너무 좋은 덕후들만 진학해야 한다는 말도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 같다. 


이런 복합적인 관점에서 김박사넷에서 가장 쉬운 먹잇감이 되는 대상은 인문사회 대학원생이다. 인문사회전공은 이공계에 비해 학자금 지원이 적고, 졸업 후 마땅히 일자리를 찾을 데가 없다는 면에서 집에 돈이 썩어나게 많지 않다면 뭐하러 하는지 모르겠는 학문으로 여겨지고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내 딴에 조금은 변명을 해보고자, 상식적으로 완전 말도 안 되는 투자를 하고 있는 인문계생들이 어떻게 이공계생들만큼 당신을 위해 일을 하고 있는지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물론 설득력이 제로일수도 있다)


'상소문 에디션'이라는 웨어러블 디스플레이가 나오면, 우리는 언제든 간편하게 큰 화면으로 원하는 영상을 시청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공계생들이 우리를 위해 해낸것이다!


LG의 롤러블폰 예상 이미지 (출처 : 렛츠고디지털)


이렇게 이공계 분야에서 내놓는 성과들은 우리의 오감에 직관적으로 와닿는다. 그에 반해 인문계 분야에서 내놓은 성과들은 어떤가. 4년간 정치외교 학부생을 지낸 나는 여전히 정치가 얼마나 개선되었는지 전혀 모르겠다. 학부 전공은 겉핥기라지만 나름 인생에서 4년의 시간을 공부해왔음에도 눈에 띄는 점이 보이지 않는데 비전공자들이 보기에는 더 그렇지 않을까.


그래서 나도 인문사회 전공자들이 하는 일이 이공학 전공자들이 하는 일에 비해 가치가 덜 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당최 보여줄 수도 없고, 보여 줄 것도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이공계생들은 뭔가를 개선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만 인문계생들은 현학적인 말장난만 한다고 생각했었다.


굉장한 오판이었다.


오판이라고 느끼게 된 건 그리 큰 계기도 아니었다. 뜬금없게도 '장애'에 대해 연구하는 사람들을 만난 것, 그게 전부였다. 부끄럽게도 내가 그동안 장애에 대해 생각한건, 불편, 힘듦, 제약, 도와줘야겠다 그러나 내 시야에 잘 보이지 않는다 정도. 그 이상 생각해본 적이 없다. 참으로 짧고 무식하다. 근데 그렇게 내가 무시해왔던 문제에 대해 밤새워 고민하고 시간을 바쳐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장애인은 모두 불쌍하고 도와줘야하고 그런게 아닐까라는 멍청하기 짝이 없는 생각을 하던 나와 달리 누군가는 어떤 것을 장애라 할 수 있는지, 누구를 도와야 하는지, 장애라는 게 얼마나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들쑥날쑥한 개념인지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장애에 대한 정의는 한 사회를 비추는 프리즘이다. 가장 쉬운 예로 혈우병을 들 수 있다. 혈우병은 피가 잘 응고하지 않아서 출혈이 잘 멈추지 않는 병이다. 1970년대 이전에 혈우병을 가진 환자는 장애인에 속했다. 그러나 의학기술이 발달하면서 혈액응고제가 시판되고, 혈우병 환자 가족 협회, 의사협회 등 많은 집단들이 혈우병이 '장애'가 아니라 단순한 '질병'이라는 주장을 전개하면서 혈우병은 정상화(normalisation)과정을 거쳤다. 


현재 에이즈가 70년대 혈우병의 정상화 과정과 같은 길을 걷고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에이즈는 고칠 수 없는 불치의 병이자 일상 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특히 직업을 가질 수 없는 장애로 여겨졌다. 그러나 에이즈 치료법이 발달하고 에이즈가 당뇨처럼 평생 관리가 가능한 질병이라는 인식이 생기면서 에이즈도 일상생활의 '장애'라는 범주에서 벗어나고 있다.*


혈우병, 에이즈의 정상화 과정은 질병, 그리고 장애가 절대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얼마든지 변화가 가능한 살아 움직이는 개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에이즈를 바라보냐에 따라 에이즈는 일상생활에 제동을 거는 장애가 될 수도 있고, 당뇨나 고혈압처럼 친숙한 질병이 될 수도 있다는 거다. 


근데 이렇게 장애를 연구하는 것 그리고 장애와 질병을 구분하는 것이 왜 우리한테 중요할까? 이게 왜 이공계생들이 웨어러블 디스플레이를 만드는 것만큼 우리한테 중요할까?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하다. 내가 그 장애/질병을 가지지 않는 사람일 경우, 내 세금이 낭비되지 않고 진짜 필요한 곳에 쓰이는 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 내가 그 장애/질병을 가진 사람이라면, 내가 도움이 필요 할 때 국가가 어떻게 도와주는 지 알 수 있는 기준이 된다. 


프랑스에서 수행된 기능장애(시각, 청각, 거동, 정신장애 등 신체 기능에 대한 장애)와 빈곤 간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를 살펴보면, 청각장애인의 경우 비장애인에 비해 빈곤지수가 낮으며 오히려 청각장애인의 가계소득이 비장애인 일반인구에 비해 더 높다. 이런 경우 단순히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국가에서 일괄적으로 재정지원을 해주는 것이 과연 필요한 정책일까? 


프랑스 정치사회맥락에서 청각장애인이 비장애인보다 경제적 상황이 좋은 이유는 주로 청각장애가 60세 이상 은퇴인구에서 흔히 발견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은퇴인구는 상대적으로 연금을 많이 받기 때문에 전체 인구 대비 노령인구의 빈곤율이 굉장히 낮은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통계적으로 청각장애인들이 비장애인에 비해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나타난다. 그래서 단순히 청각장애를 앓는다고 해서 재정지원을 해주는 게 세금 손실일 수도 있다. ** 


그에 반해 한국은 전체 인구 대비 65세 이상 노령인구의 빈곤율이 OECD 중 압도적으로 높다. 이런 경우는 오히려 노령의 나이에 의한 청각장애와 더불어 다른 장애들을 동시에 겪으면서 경제적 빈곤을 겪는 인구가 많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래서 한국 맥락에서는 청각장애를 겪는 인구에 재정지원을 해주는 게 너무 필요하고도 타당한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OECD국가 대상 65세 이상 인구의 빈곤율을 나타내는 그래프, 다이아몬드는 전체인구의 빈곤율을 의미한다. 노란색 표시된 데이터가 한국이다.


이렇게 불필요한 세금 손실을 막아주는 문과생들의 역할은 두번째 역할에 비하면 사실 별 거 아니다. 


젊고 건강한 현재 시점에서 보면 이런 연구가 무의미하기도 하고 배부른 연구라고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장애와 질병은 누구에게나 아무런 징조 없이 갑자기 찾아온다. 내 자신의, 그리고 내 가족의 질병은 심리적으로도 엄청난 충격이지만 경제적인 충격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이런 취약함에 맞서 국가가 나에게 보호막을 제공해준다는 것은 좁게 보면 병환을 극복할 수 있는 버팀목이 된다는 것, 크게 보면 통제할 수 없는 리스크를 대비하기 위해 미래를 저당잡히며 살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다. 


근데 이렇게 중요한 정책이 잘못 설계되었다면? 장애나 질병에 대한 정의가 잘못 세워져서 내 질병이 국가로부터 보장받지 못한다면? 질병으로 인해 진짜 도움을 받아야 할 사람은 못 받고,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될 사람이 받고 있다면? 누구든 아플 수 있고, 누구든 장애를 가질 수 있는 현실에서, 아무런 보호막이 준비되지도 연구되지도 않은 사회는 그 안의 개인을 더 아프게 만들 수 밖에 없다.


문과생들이 하는 연구는 단기간에 그 결과가 나오지도 않고, 가시적인 성과가 있지도 않다. 그래서 그 의미가 퇴색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공계 연구가 단기간에 뿅 하고 나와서 센세이션을 일으킨다는 뜻은 아니다. 학문을 하는 사람들의 노고는 전공을 불문하고 높은 것이다.)


그런 비가시성 때문에 문과의 연구가 평가절하 받는 일이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굉장히 중요하고 핵심적인 문제를 이야기하는 분야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당신이 문과생이라면 좀 더 자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학벌을 비교하고 좌절하기 전에 당신의 연구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한번쯤 끝까지 생각해봤으면 좋겠다. 




* Danièle Carricaburu, L'hémophilie au risque de la médecine. De la maladie individuelle à la contamination collective par le virus du sida, 2001 

** Le niveau de vie des personnes handicapées : des différences marquées selon les limitations, DREES,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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