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그게 전부일까
인생의 많은 부분은 우리의 선택과 무관하게 무작위적인 운에 따라 정해진다. 언제 어디서 어떤 환경과 부모에 의해 어떤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는 지가 인생의 상당부분을 결정한다. 하지만 의외로 이런 사실을 간과하는 사람이 많다. 특히 자신이 나름대로 성취한 것에 큰 자부심을 가진 이들 중에는 오만한 인간들이 꽤 있다.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신이고, 인생의 성패를 개인의 노력과 책임으로만 생각하는 이들은 기본적으로 상상력만 모자란 게 아니라 과학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는 병자들 같다.
- 정승구, <쿠바, 혁명보다 뜨겁고 천국보다 낯선> -
사내 봉사활동으로, 서울역 근처에 위치한 고아원에 방문한 적이 있다. 생각보다 정말 많은 아이들이 있었고, 개 중에는 태어난 지 두 달이 채 안 돼 보이는 갓난아기도 있었다. 네 살 배기 아이들이 갓난아기를 안고 이리저리 다니는 것을 보다 문득 갓 두 돌이 지난 조카가 생각났다. 태어나자마자 계급이라는 게 정해지는 건가. 온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라는 조카와 낯선 이에게조차 두 팔 벌려 안아달라 사랑을 구하고 경쟁하는 이 아이들은 같은 세상에 살지만 다른 종류의 인간인 걸까.
훌륭한 부모 아래서 사랑 받고 자란 내 조카는 성장하여 사회에 나갈 때까지 부족함 없이 자랄 것이다. 고아원에서 만난 아이들은 의무교육을 마치고 나면, 진로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밥벌이에 뛰어들어 삶을 꾸려가기에 급급해 할 확률이 높다. 이들은 자라나는 환경뿐만 아니라, 유년기 그들의 머릿속에 새겨진 기억으로 인해 전혀 다른 종류의 그늘을 가지고 살게 될 지도 모른다. 쉽게 그려지는 이 두 아이들의 삶에서 그들이 한 일이라곤 태어나는 것뿐이었다. 아득했다. 이 생경한 대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우리는 불우한 가정사를 이겨내고 자기 힘으로 일어선 사람의 스토리에 곧 잘 감명한다. 고아원 아이들의 삶을 아주 잠깐 들여다 본 것만으로도, 그런 인생역전 이야기에 열광했던 내가 역겨워졌다. 자수성가에 방점을 찍어, 그들이 지나온 고난은 자극적인 교훈쯤으로 소비했다. 진짜 귀 기울였어야 하는 부분은 그들 과거에 담긴 고난이었다. 그리고 내가 마땅히 느꼈어야 할 것은 불우한 가정사에 고통 받는 아이를 내버려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이어야 했다.
여전히 우리 주변엔 타인의 환경에 대한 상상력이 결핍된 오만한 병자들이 훨씬 많다. 서슴없이 사람은 끼리끼리 지내야 한다는 말을 내뱉고, 금수저 출신이니 흙수저 출신이니 하며 상대의 자라난 환경에 따라 다른 색안경을 끼고 바라본다. 인종차별, 성차별 같은 거대담론에는 주춤하면서 나면서부터 정해진 환경적 요소에는 왜 아무렇지 않게 차별적 발언들을 내뱉을까. 과학적 사고의 결핍이라는 정승구 감독의 지적이 정확하다. 운으로 대변되는 확률에 대한 개념이 없는 거다.
인류는 모두 평등하니 차별 없이 대해야 한다는 성인군자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지극히 이기적인 발상에서 ‘사고의 유연성’에 대해 이야기하려 함이다. 사고의 유연함이란 인생에 있어서 운의 비중을 간과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하여 타인의 삶뿐만 아니라 내 삶에 대해서도, 우리가 결정할 수 없었던 불가항력적인 요소가 있었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주는 것이다. 또한 언제든 내가 선택할 수 없었던 요소들로 인해 내 자신도 차별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 유연한 생각들이 모여야 비로소, 운에 의해 개인의 인생이 송두리째 휘둘리지 않도록 문화를 만들고 사회 안전망을 만들게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문화와 안전망은 다시 나를, 내 조카를, 고아원의 아이들을 보호해주는 울타리가 되어 우리가 계속해서 유연한 사고를 해나갈 수 있도록 도와 줄 것이다.
자기가 쏜 화살은 언젠간 자신을 향해 돌아온다. 변할 줄 모르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있는다면, 돌아온 화살에 가슴을 내어줄 수 밖에 없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