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구슬 Apr 05. 2024

이혼에 직면했습니다.

7. 힘듦에도 직면하기

삶이 힘들어지면 두 가지 갈림길에 서게 되는 것 같다.

회피 또는 직면

나는 회피 따윈 사실 생각하진 않았다.

서울에서 창원으로 내려오는 아버지 스타렉스 차 안에서 구인사이트를 뒤적거렸듯이, 나는 현실의 힘듦보다는 앞으로 딸과 살아나갈 것에 더 신경을 썼다.

슬픔을 느낄 새가 없었다.

그래서 그랬던 걸까? 사실 이 상황이 크게 힘들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신호등이 빨간색임에도 횡단보도를 무심코 건너다 차에 치일 뻔 한적,

동생차를 빌려 백화점 주차장을 가면서 역주행을 한적,

등등의 일을 겪으면서

'아... 내가 힘이 들긴 드는구나...'를 비로소 깨달으며 이 힘듦에 대해서도 회피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부모님과 이 상황에 대해서 많은 대화를 나눴으며 그토록 하고 싶었던 집에서 영화 한 편 보는 것, 유튜브로 음악 듣기를 마음껏 했다.

집에서 영화 보기, 유튜브로 음악 듣기가 뭐 그리 힘든 일이냐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결혼 후 3개월도 되지 않아 임신을 했고 입덧으로 거의 죽다시피 임신기간을 지내왔으며 돈에 쪼들려 아이 24개월이 지나자마자 어린이집에 맡겨졌다.

7시에 일을 마치면 100미터 달리기를 했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어가 어린이집으로 딸을 데리러 갔다.

보통 3시쯤이면 엄마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었다.

조금이나마 더 빨리 딸을 보기 위해 전력질주를 했다.

그러고 나면 집에 와서 배고픔에 허덕이는 3살 아이에게 만둣국을 끓여주며 집안청소를 했다.

아이를 씻기고 책육아에 진심이었던 나는 밤새도록 아이가 잘 때까지 책을 읽어줬다.

내 생활은 없었다.

그래서 영화 한 편 보기, 유튜브로 음악 듣기는 생각할 수 없는 사치였다.






창원으로 내려와 다행인지 안다행인지 일자리를 구하기 어려웠던 시기에 유튜브로 음악을 듣기 시작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의 영상을 많이 보게 되었는데 특히 김미경 님 강연을 많이 보게 되었다.

바닥으로 떨어져 있던 자존감을 어루만져 주었고, 나만 이게 힘든 게 아님을 깨닫게 했다.

덕분에 책 읽기도 시작했는데 왜 성공한 사람들이 책을 강조하는지 알 것만 같았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나는 언젠가는 잘 될 사람이라는 생각을 계속하게 됐다.


"저는 무명시절에도 힘들지 않았어요. 나는 언젠가는 꼭 잘 될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걱정할 시간에 기타 연습이나 더 하자라고 생각했어요 "

아이유 님 인터뷰가 무심코 떠올랐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책 읽기를 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책 읽기, 글쓰기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생각했던 사람이었다.

책에 줄을 긋고 좋은 말은 필사까지 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면서 뭐든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시 월급이 210.

월급이 더 올랐으면 좋겠다고 막연히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책을 읽으면서 근로소득 외에 부수입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N잡이라는 말도 알게 됐고, 나도 N잡러가 되야겠다고 생각했다.


게 블로그를 시작하게 되었다.

시작하 된 동기는 블로그가 돈이 된다고 해서였다.

하루 30분만 투자하면 100만 원을 번다고 하니 10만 원만 더 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내가 안 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몰랐고 10만 원을 결제하면 블로그 하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강의를 들었다.

결혼 후 나에게 투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10만 원을 결제하면서도 손이 덜덜 떨렸다. 당시 10만 원은 나에게 큰돈이었다.

7시 퇴근 후, 아이를 케어하고 블로그강의를 들으며 하나하나 배워갔다.

1일 1포(하루에 한 개씩 포스팅하기)를 하면 좋다고 해서 회사 점심시간에 밥을 빨리 먹고 실력 없는 글이지만 최선을 다해서 글을 발행했다.

처음 발행한 글을 보면 웃음이 나온다.

고작 5줄의 글을 쓰며 힘들어했던 내가 기억나서.


당시 내가 제일 부러워했던 사람은 협찬을 받아 맛집이나 제품을 이용한 후, 글 밑에 제품을 제공받아 직접 사용하고 쓴 글입니다 라는 협찬멘트를 적을 수 있는 블로거였다.

원고료를 받아 글을 쓰는 사람들은 감히 내가 부러워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었고...


한 달 정도를 열심히 글을 썼더니 나에게도 협찬의 기회가 왔다.

유전인지 스트레스 때문인지 흰머리가 많았는데 염색약협찬이었다.

너무 기뻐서 눈물이 찔끔 났다. 내 힘으로 뭔가 이룬 거 같아서.

쉬는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비포 사진을 찍고 염색과정을 찍은 후 애프터 사진을 찍었다.

거기에 내 스토리를 쓰고 염색약리뷰를 했다.


나는 평일에도 쉴 수가 있었는데, 휴무날에는 아침에 호텔스파에서 마사지를 받고 점심에는 친구와 마산오동동거리에 가서 아귀찜을 먹고 카페에서 디저트와 커피를 즐긴 후 집으로 돌아왔다.

이 모든 것이 다 공짜였다. 대신 집에 와서 리뷰만 하면 됐다. 내 블로그에.

체험단을 신청하는 것이 마치 쇼핑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당시 극도로 소비를 줄였는데, 굉장히 힘들었다.

아이 키우는 집에서 카드값 39만 원이 나왔으니 얼마나 소비를 줄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나에게는 1원 한 장 쓰지 않았다. 길가의 붕어빵이 보이면 천 원 한 장 쓰기 싫어서 꾹 참았다.


사실 이 기간 동안에도 상간녀소송을 할까 말까 고민을 하기도 했었다.

그년이 마치 피해자인 것처럼 나에게 밤마다 전화와 문자질을 해댔기 때문이다.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로 알 것 같아 유명한 변호사를 알아보고 그년과 주고받았던 카톡내용을 첨부해서 보여줬다.

2000만 원은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나는 소송을 진행하고 싶었지만 엄마가 말렸다.

소송기간 동안 내가 많이 힘들어질 거라고...

나는 많은 고민 끝에 소송을 하진 않았다. 대신 그년의 번호를 수신차단하고 앞으로 응대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밤이건 낮이건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면 아직도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린다.

일종의 트라우마.

부재중 통화가 와 있는 걸 확인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전화를 했는데 택배기사님이면 마음이 놓이는 상황

누가 겪어봤을까?




이 시기에 나에게 블로그가 없었다면 사실 이혼에 직면하기 어려웠을 것 같다.

당연, 회피는 하지 않았을 테지만 블로그가 이혼에 직면하기에  많은 도움을 줬다.

육아와 블로그 성장에 온통 신경을 썼기 때문에 우울할 틈이 없었고, 나도 뭐든 도전하면 이룰 수 있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잘못은 다른 연놈이 했는데 내가 왜 고통스러워 하나 생각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면 그 놈들은 마땅히 고통받을 것이며, 나는 그동안의 고통을 보상받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다 하더라갑자기 로또에 당첨돼 일확천금을 만나는 행운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노력한 일에 대해서는 약간의 운을 더해 마땅한 대가를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지금 노력의 대가를 받고 있는 중이 아닐까 생각한다.



첫째, 나는 그놈의 사기에 빈털터리가 된 모님께 결혼 전 모아놨던 돈을 고스란히 모두 드렸다.

부모님도 당시 힘들었기 때문에 드려야만 했다.

그래야 내 맘이 편했다.

부모님은 역시나 그랬듯 열심히 사셨고, 공기 좋은 시골에 집을 직접 지으셨다.

사기꾼인 사위에게 돈은 뜯겼지만 마침내, 넓은 거실과 텃밭이 있는 집을 지으셨다.

사과나무, 블루베리, 포도, 고구마, 감자 등등 없는 게 없을 정도로 부모님은 열심히 농사도 지으셨다.

마당에 풀장도 직접 만드셔서 여름에는 손녀와 물놀이도 하셨다.

두 분 다 65세가 넘으셨지만 드시는 약 하나 없다.

고혈압이니 당뇨니 다 남들 이야기다.

너무나도 감사하다.


두 번째, 우리 딸은 매 학기 봉사위원에 뽑히고 학교생활을 즐겁게 한다.

피아노에 소질이 있어 콩쿠르에 나가면 상과 장학금까지 받아온다.

아빠가 엄마에게 돈을 주지 않기 때문에 당분간 연락이 와도 받지 않았으면 좋겠고, 문자가 오면 답장을 안 해줬으면 좋겠다고 한 나의 부탁에 흔쾌히 엄마를 이해해 주는 봄날의 햇살과 같은 존재이다.


세 번째, 대한민국 연령대별 평균 소득

30~34세 : 319만 원

35~39세 : 368만 원

40~44세 : 392만 원

45~49세 : 395만 원

월급은 작지만 안정적인 직장에 부수입까지 더하니 40대 평균 소득을 훌쩍 웃돌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현금 1억에 11월에 입주할 아파트 중도금 1억까지 하니 별거 + 이혼기간 동안 총 2억을 모을 수 있었다.


회피하지 않고 직면했더니 어릴 읽었던 이솝우화처럼,

그래서 박구슬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라고 끝맺음 할 수 있을 거 같아 설렌다.

두근거림에 부정을 한 방울 떨어뜨리면 두려움이 되고, 긍정을 한 방울 떨어뜨리면 설렘이 된다.

나는 내가 앞으로 얼마나 더 잘 살지 설렌다.


이혼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힘든 상황에 놓인 분들,

이혼 후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든 분들


회피하지 말고 직면하길.





우리는 무조건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으니까 :)














작가의 이전글 그만두는 것은 포기가 아닙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