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창원으로 내려와 제일 처음 적응이 안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사투리'였다.
아니 내가 30 평생 창원에서 살면서 사투리를 듣고, 사투리를 쓰며 살았는데 무슨 새삼스레 사투리가 적응 안 되는지 나 자신도 의아했다.
특히, 집 근처 시장이라도 가면 왜 서울사람들이 경상도 사투리가 싸우는 것처럼 들린다고 하는지 이해가 될 정도였다.
서울에서 고작 6년 살다가 온 내가 이런 말하면 참 우습기도 하지만 사실이었다.
인상이 찌푸려지기도 했으니 참 지금 생각해 보니 가관도 이런 가관도 없다.
나는 창원에서 한동안 서울말을 썼다.
나는 서울이 좋았다.
지금도 tv에서 서울 모습이 보이면 가슴이 아린다.
세상에 그런 일을 겪고도 서울이 좋다니 참 이상한 여자 일세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용기만 있다면 다시 살고 싶은 곳이다.
나는 특히 한강을 좋아했다. "여기가 바로 티비에서 보던 한강이구나"
아이와 자전거도 타고, 연날리기도 하며, 한강라면을 먹었던 추억의 장소.
다시 가서 아이와 자전거도 타고 연날리기도 하고 한강라면을 먹을 순 있겠지만. 이제 그 장면에 그놈은 없겠지.
창원에선 부모님, 남동생과 정말 조그마한 전셋집에서 살았다.
낡고 낡은 주택이었는데 손님이라도 오면 집이 꽉 차게 느껴질 정도였다.
도대체 우리는 언제 집을 소유할 수 있으며, 깨끗하고 넓은 집에서 언제 살 수 있을까 생각도 많았다.
부모님은 항상 열심히 일하는데 돈은 모이지 않았다.
돈 때문에 싸우는 부모님 밑에서 나는 돈걱정 없이 살 수 있는 사람과 결혼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선택한 부분도 있다.
강남 25평 아파트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7년 동안의 직장생활을 마치고 서울이라는 곳에 가니 아주 설레고 좋았다.
깨끗한 화이트톤의 인테리어와 새 가전제품, 조용한 아파트 분위기, 점잖은 주민들...
모두가 다 마음에 들었다.
낡고 낡은 주택살이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세련된 삶이었다.
하지만 그 삶도 오래가지 않아 남편의 투자실패와 외도로 이 생활을 그만 두기로 결심했다.
"그만두는 것"은 포기가 아니다.
다음으로 넘어간다는 뜻이다.
그만두어야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
창원으로 내려와 첫 번째 직장에서 한 달을 채우지 않고 그만두고 두 번째 직장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그중 나보다 10살 어린 친구가 추천해 준 타이탄의 도구들이란 책에서 나온 말이다.
사실 그때만 해도 이혼하지 않은 상태였다.
별거였다.
딸이 없었다면 둘도 셋도 생각 안 하고 바로 이혼했을 텐데, 참... 어려웠다.
학창시설 엄마는 항상 말했다.
"느그들 때문에 내가 이혼 안 하고 이리 산다. 지인짜 느그 아빠랑 살기 너무 힘들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뭐가 우리 때문에 이혼 안 한다는 거야? 이혼할 용기가 없으니 안 하는 거겠지.
혼자서 살기 싫어서 괜히 우리 핑계 대는 거 아니야?
그냥 이렇게 싸울 봐엔 이혼하는 게 훨씬 낫겠다!
그날로부터 20여 년이 흘렀고
나는 딸 때문에 이혼을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는 여자가 되었다.
엄마처럼.
그래,
그만두는 것은 포기가 아니지.
다음으로 넘어간다는 뜻.
나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결심했더랬다.
나는 사실 투자실패, 외도뿐만 아니라 그의 정신상태가 무서워서 별거를 결심했다.
첫 번째,
우리 부모님께 1억을 빌리고 갚지 않으면서도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다하고 다녔다.
부모님이 돈이 많아서 1억을 빌려주셨을까? 안먹고 안입고 모은돈 8천만원을 투자금으로 건내셨다.
조금이나마 이자를 더 받을 수 있을까하고...
그 후 원금을 받지도 못한 상황에 울고불며 자기 죽는다고 2천만원을 더 빌려달라 했다고 한다.
나는 사건이 터지고 알게 되었는데, 마음약한 아빠에게 전화를 해선 돈이 없다면 대출이라도 받아서 달라고 했단다. 어리석은 우리아빠...일을 하다 말고 보험약관대출을 받으러 뛰어가셨다고 한다.
그 전화를 받고 아빠는 고민을 잠시 하셨다고 하는데, 그래도 내 자식이라는 생각에 대출까지 받아 그놈에게 줬다고 한다.
결국 한푼도 받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은 다 하고 다닌 미친놈이었다.
그중 기억 남는 것은 어느 유명한 작가에게 글 쓰는 법을 배우면 책까지 내준다고 했다는데, 그 비용이 천만 원이었다. 그걸 카드로 긁었다고 한다.
더 이상 화도 나지 않았다.
두 번째,
3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큰 빚을 지고 자기 나름 열심히 일을 한다고 하는데 여기저기 안 좋은 소리가 들리고 와이프인 나에게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니 기댈 곳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 기댈 곳이 그년 + 점쟁이였다.
사람이 극한으로 힘이 들면 나약해지기 마련이다.
내 말을 조금이나마 들어주고 이해해 주는 사람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는 법.
그런 사람이 그년 + 점쟁이 었던 거 같다.
집에 자주 돌아오지 않았던 그 시절, 아침에 들어온 그 사람에게 도대체 뭐 하다가 들어왔냐고 하니 산을 넘고 왔다는 황당무계한 말을 펼쳐놓았다.
새벽 3시에 하얀 옷을 입고 산을 타고 오면 일이 잘 풀린다고 점쟁이가 말했다고 한다.
그리곤 자기 일과를 하나하나 그 점쟁이에게 다 보고 했으며, 굿까지 했었다는 걸 알고 기가 막혔다.
또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점쟁이와 나눈 문자를 보곤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문자를 보니 그 점쟁이가 어쩌면 나를 죽이라고 말 할 수도 있겠다는 섬뜩함을 느꼈다.
세 번째,
친정부모님이 올라와서 한번 믿어준다는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음 날 바로 그년과 사랑을 속삭인 카톡을 봤을 때 제정신이 아님을 인지했다.
그리곤 뭔가 모를 무서움까지 밀려왔다.
일단은 이 서울을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이곳을...
나는 그 날의 결심을 칭찬한다.
3년간의 별거생활이 있었지만 마침내 이혼 했다.
다른 사람들은 결혼에 실패했다 말한다. 하지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혼에 성공했다.라고
3년간의 힘든 별거를 마친 후 비로소 내 인생 섹터가 넘어갔다.
그래, 그만두는 것은 포기가 아니었어.
다음으로 넘어가는 거지.
그때 알았을까? 내가 이렇게나 잘살지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