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구슬 Apr 13. 2024

학교 다녀온다 말하고 이혼하고 왔습니다.-1

8. 개인사정

별거 후 다시 사이가 좋아진 경우가 있는지 궁금하다.

에게는 3년의 별거기간이 이혼에 대한 확신을 주는 기간이었다.

아이가 없었다면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서류에 도장을 찍었겠지만

자식이 뭔지,

내가 부모님의 딸일 때는 이해하지 못한 감정으로 깊은 고민에 빠지게 하는 존재였다.


더군다나 아이러니하게도 아이에게는 좋은 아빠였기 때문에 더욱 고민을 많이 했다.(좋은 아빠였음 바람 따윈 피지 않았겠지만)

차라리 아이에게 관심 없는 무뚝뚝한 아빠였음 고민하는 시간도 덜했을 텐데 모든 걸 다 수용해 주고 잘 놀아주는 아빠를 딸이 참 좋아라 했다.


내가 이 관계를 끊는 것만 같아서 눈을 감고 쇼윈도 같은 부부생활을 이어나가야 하나 고민을 한 3년이었다.

지금은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지만 당시 아이가 유치원을 다니는 시기였고, 갑작스레 둘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건 아이에게도 정서상 좋지 못하다는 판단이 들어 한두 달에 한 번씩은 만났다.


내가 사는 이 집에 발도 들이지 못하게 하고 싶었지만 자연스레 딸과 사는 집에 들어오게 됐고, 뻔뻔하게도 그는 거실에서 코를 골며 잠을 자기도 했다.

처음 우리 집에 왔을 때 꼴도 보기 싫어 냉랭하게 대했더니 아이가 내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래서 이왕 보기로 한 거 기분 좋게 이 시간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등신 같은 년

바람피운 남편에게 밥을 차려주면서 내가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는 아빠와 집에서 마리오게임을 하며 즐거워했고 그런 모습을 보는 나는 순간 행복했다.

나는 평일에는 보통 회사 집 회사 집이었는데 차가 없어 어디 멀리 놀러 가기도 힘들었다.

한 달 혹은 두 달마다 그가 오는 날을 나름 힐링데이라고 생각하고 이왕 오는 거 즐기자고 생각했다.

그가 며칠에 딸을 보러 온다고 하면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서치 했고 나들이를 갔다.

분위기 좋은 카페에 가서 셋이서 팥빙수를 먹으며 그림을 그렸고, 여름이면 근처 해수욕장에 가서 물놀이도 했다.

어린이날이 되면 서울에 놀러 가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셋이서 놀이동산을 가고 저녁에는 청계천에 가서 발을 담그기도 했다.

나는 그 순간순간 이런 관계가 또 있을까 생각했다.

남들이 보기엔 보기 좋은 가족이다 생각하겠지? 어느 누가 우릴 별거하는 부부그 딸이라고 생각할까?


나는 이 기간 또한 이혼하는 과정이라 생각했다.






내가 별거를 마음먹고 창원으로 내려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그동안 쌓인 아시아나 마일리지가 많다며 해외여행을 가고 했다. 그 미친놈이.

그걸 아이에게도 말했는지 아이는 너무나도 가고 싶어 했다.

미친년은 또 그걸 수락하곤 아이와 짐을 싸서 별거기간 동안 해외여행을 갔다.


그곳에서 아무 일도 없는 평화로운 부부처럼 수영을 하고 컵라면을 먹는데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눈길이 자연스레 핸드폰으로 갔다.

어느 여자와 단둘이 찍은 셀카사진과 함께 내 사랑 ♡이라는 여자에게 전화가 왔다.


와 이 미친놈 진짜, 답 없구나.

더군다나 그 여자는 바람피운 첫 번째 여자가 아니었다. 다른 년이었다.

화를 내고 싶지도 않았다.

해외여행까지 간 내가 미친년이었다.

아이에게 싸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꾹 참고 그냥 이 여행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이럴 때는 또 이혼해야지 했다가, 아빠를 기다리는 딸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약해지는 순간도 있었다.

특히, 2박 3일 동안 신나게 놀다가 이제 아빠 갈게 하고 떠나는 모습을 보며 엉엉 우는 딸을 보면서 가슴이 미친 듯이 미어졌다.

그럴 때면 또 두 눈 꼭 감고 다시 관계를 회복해 볼까?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이미 신뢰가 깨진 마당에,  회복된들 죽을 때까지 그 관계가 지속되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상상을 했다.

내가 분양받은 새 아파트에 그놈이랑 같이 지낸다?

혹여나 늦게 집에 오는 날 나는 온전히 그를 믿을 수 있을까?

껍데기만 남은 관계를 내가 지속할 수 있을까?

의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상상의 나래를 펼쳐서 나 자신을 옭아매지 않을까?


답은 나와있었다.






서류가 정리되지 않으면 뭔가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 수도 있다고 판단했다.

그는 이미 수억의 빚을 진 사람이었고, 그것이 혹여나 나에게도 돌아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분양받은 아파트도 혹시나 잘 못 되진 않을까?

오백만 가지 생각 속에 빨리 정리를 해야 나에게도 좋겠다고 판단했다.






미성년 자녀가 있으면 이혼절차도 굉장히 까다롭다.

특히 우리같이 서울, 창원 이렇게 떨어져 있는 경우에는 만나기도 힘들뿐더러 둘 다 직장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내기가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부부가 같이 법원에 가서 각종 서류를 내고 이혼 신청을 해야 한다.

각각 따로 가는 건 안 됐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 본 법원.

쫄지 말아야지 마음먹고  당당하게 이혼서류를 접수하는데 우리말고도 여러 명의 이혼예정 부부들이 많이 보였다.

갓 결혼해 보이는 부부, 60대 부부 등

왠지 그들을 보고 있자니 위로가 되었다.


서류를 접수하면 상담위원의 의무면담이 있다.

드라마 사랑의 전쟁에서 본 것처럼 상담위원 앞에 앉아 면담을 했다.

어떤 이유에서 신청을 하게 됐는지 양육비는 어떻게 할 건지 등등을 정하고 나왔다.

그 후 자녀양육에 관한 동영상을 보게 했다.

부모의 이혼 후 자녀가 안정된 정서로 생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는 부모의 역할들이 드라마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혼 가정 자녀들의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숙려기간 3개월을 진행하고 협의 이혼 의사확인 기일에 다시 만나야 했다.

이날 부부 중 한 명이라도 나오지 않으면 이혼은 무효가 되는 거였다.

협의 이혼 의사확인 기일은 내가 정할 수 없는 통보된 날짜였는데, 나는 제발 월요일이나 수요일만은 안되길 바랐다.

당시 재직 중인 회사는 내가 원하는 평일 하루를 쉴 수 있었는데 월, 수는 바쁜 요일이라 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협의 이혼 의사 확인 기일은 월요일이었고 시간은 1시 30분이었다.

법원과 거리가 있어서 아무리 점심시간에 나갔다 온다 한들 2시까지는 회사복귀가 힘들었다.

그리고 그날 얼마의 시간이 소요되는지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사장님께 개인사정이 있어서 다음 주 월요일은 점심식사 후 3시까지 들어올 수 있겠다고 말했더니 어떤 이유냐고 물었다.

이혼하러 갑니다.

라고 말할 순 없어서 그냥 개인사정이라고 했더니, 그 사장이란 놈도 그냥 넘어가면 될 것을 어떤 개인사정이냐며 꼬치꼬치 물었다.


아이 학교 상담이 있어서요.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나는,

봄날의 햇살이 반짝이던 5월.

이혼하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반짝반짝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작가의 이전글 이혼에 직면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