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구슬 May 09. 2024

이혼 후, 그 이름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겼습니다.

11. 흔한 그 이름

요즘에는 뭐만 했다 하면 트라우마 타령이다.

진짜 트라우마라는 말을 붙여야 할 때 보다 자기가 하기 싫어하는 일에 대한 변명거리로 오히려 더 많이 쓰는 거 같다.


트라우마 :

정신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는 격렬한 감정적 충격.

여러 가지 정신 장애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최근 포비아(공포증)라는 말도 흔히 쓰는데 콜 포비아, 카톡 포비아, 벌레 포비아, 불결 포비아 등등 이름도 잘 만 갖다 붙인다.


자주 보는 TV 프로그램 연애의 참견에 한 남자가 사연을 보내왔다.

여자친구가 갑자기  전화 포비아가 생겼다 말하면서 남자친구인 본인 전화를 잘 받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내용이었다.

더군다나 그 여자친구는 불결 포비아까지 있는데

직접 택배박스도 뜯지 못하는 포비아인지, 택배 5개가 온날, 남자 친구에게 빨리 와서 택배박스를 정리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정작 길거리에 누군가가 버려놓은 화장대를 보며 자기 집에 잘 어울리겠다고 들고 가는 앞 뒤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며칠 전 이혼 후 샤넬백을 팔았습니다. 제목의 글을 썼다.


아들에게 얘기합니다.

샤넬백 사달라는 여자.

무조건 거르라고요.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셔서 다행이네요.ㅋㅋㅋ


큭큭 대는 댓글을 보며 나는 사람 트라우마가 생겼다.


평소 같으면 그냥 아무렇지 않게 넘길 멘트였을 수도 있지만 피곤누적인지 며칠 동안 몸이 안 좋았고 그런 상황에 이런 댓글을 마주하니 가만히 있고 싶지 않았다.

타인의 글에 조롱하듯 댓글을 다는 여자도 무조건 거르라고 아드님께 가르치셔야겠다고 하니 또 이런 댓글이 달린다.


솔직히 전남편 돈 많아서 결혼하고, 아니다 싶어 이혼하신 거잖아요..







연애의 참견의 수많은 사연들을 보며 패널 곽정은 님은 '인류애가 없어진다'라는 멘트를 자주 하는데, 나 또한 최근 인류애가 사라짐을 느꼈다.






사실, 나에게 트라우마는 '보경'이라는 이름이 보일 때마다 생기곤 한다.

이 이름이 보이거나 들리면 심장이 두근거리며 그때의 상황으로 빨려 들어간다.


초등학교 4학년 딸은 보경이란 이름이 2024년 엄마에게 들려오면 어린이집 다니던 아이로 변한다.

핸드폰을 신줏단지처럼 모시고 다니던 전남편은 그날따라 웬일로 이부자리 위에 핸드폰을 놔두고 샤워를 하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아무렇지 않게 넘길 상황이었지만 그날은 아니었다.

나는 핸드폰을 집어 들어 비밀번호를 눌러댔다.

계속 아니라고 울려대고 마음이 급해 딸에게 말했다.


혹시 아빠 비밀번호 알아?

응.

똑똑한 내 딸. 한 번에 비밀번호를 맞혔다.


나는 그가 나올세라 어떤년인지 보기 위해 카톡을 뒤적였고 거기에는 보경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보고 싶다는 말과 함께.


그 이후로 보경이는 나에게 불륜을 들켰음에도 불구하고 적반하장으로 나왔다.

둘이 찍은 사진과 함께 빨리 헤어지라며 날 협박했고 수많은 욕이 오고 갔다.


더 이상 같이 살 수 없겠다 판단하고 이사를 계획했다.

남편에게 알리지 않고 집을 정리했고, 이사 가기 며칠 전에 통보했다.

창원으로 내려오기 바로 전날 울며불며 무릎을 꿇던 그였지만 그날 밤에도 밖에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창원으로 내려왔지만 끝은 아니었다.

보경이는 계속해서 새벽에 전화해서 날 깨웠고, 내가 본인의 남자 친구인듯 수시로 문자며 카톡을 해댔다.


나는 내 삶이 중요했다.

딸도 남부럽지 않게 키워야 했고, 더 이상 그년의 농락에 휘둘려선 안된다고 판단했다.

제3자가 볼 때,

어찌 보면 나약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년의 번호를 차단했다.






아이는 창원에서 새로운 유치원을 다니게 됐다.

적응도 잘해서 선생님 말에 따르면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도 좋다고 했다.

유치원 친구 엄마들은 서울에서 와서 그런지 아이가 똑똑하다며 친하게 지내자고 했다.


어느날 딸은

가장 친한 친구라며 보경이란 이름을 말했다.

티비에서는 보경이란 이름의 일반인이 인터뷰를 했고, 며칠 전 유명한 고민 프로그램에도 보경이란 이름을 가진 분이 나와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년을 피해 서울에서 창원으로 내려왔지만 내 도처에는 보경이가 수두룩 했고, 그럴 때마다 트라우마 증세가 나타났다.






5년이나 지났는데도 아직도 이렇다니, 앞으로 5년이 더 흐르면 웃으며 넘길 수 있을까?

그 이름을 아무렇지 않게 내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있을까?



작가의 이전글 이혼 후 샤넬백을 팔았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