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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구슬 Apr 23. 2024

이혼 후 샤넬백을 팔았습니다.

10.  샤테크

결혼 전 한창 잘 나가던 그는 내가 갖고 싶어 하는 것, 먹고 싶어 하는 것 모두 다 사주었다.

비싸서 고민하는 나를 보며 매번 돈 걱정 하지 말고 마음껏 고르라고 했다.

그것이 독이 되어 나에게 돌아오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돈 때문에 싸우는 부모님을 보고 자랐다.

IMF시절 거래처 부도로 우리 집도 큰 영향을 받았고, 엄마는 침대에 누워 끙끙 앓으셨다.

나는 공부에 필요한 참고서가 필요했지만 말하기가 힘들었다.

그걸 어떻게 아셨는지 엄마는 지갑에서 돈을 꺼내가라고 말씀하셨고, 열어본 지갑 안에는 만 원짜리 2장이 있었다.


내가 이걸 사게 되면 얼마 남지 않을 텐데...

우리 집 진짜 망했나?


참고서 사기가 괜히 미안했다.

초등학교 6학년이 느끼기엔 참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서 그런지 내가 돈을 버는 직장인이 되더라도 명품 사는 것엔 절대 발들이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당시 뉴스에서는 명품구매로 카드빚에 허덕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왔고,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중국어를 전공하고 면세점에 취업한 나는 매일 보는 것이 명품이었고 눈은 날로 날로 높아져만 갔다.

에코백을 들고 다니는 지금과는 다르게 그 당시 명품가방을 들고 다니지 않는 여자들을 우습게 여기기도 했다. 어떻게 그따위 생각을 했는지. 10년 전 나에게 가서 꿀밤이라도 때리고 싶다.


나름 돈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던 터라 무리하지는 않되, 내 월급에서 가능한 수준의 명품을  한 개 두 개 사모았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샤넬백의 위상은 하늘 무서운지 모르높았고, 나 역시 갖고 싶었다.

사달라는 말을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는 나에게 샤넬백을 안겨주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부러움을 많이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남친 현 전남편이 벤츠를 선물해 줘서 출퇴근용으로 쓰고 있었으니 친구, 동료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릴만했다.







나는 3년의 별거기간 동안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늘에서 정신 차리라고 나에게 이런 고난을 주는 걸까?라고도 생각했다.


결혼 후 아이가 어릴 때 남편의 투자 실패로 나는 어쩔 수 없이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가 어려 거리가 먼 곳으로 출퇴근하기는 힘들었는데, 마침 살고 있는 아파트 근처에 약국들이 많았고 그중 한 곳에 취업하게 되었다.

약국장은 70가까운 할아버지였고,  잘 봐주셔서 이런저런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당시 100억에 가까운 자산을 가지고 있던 약국장은 나에게 쇼핑을 저질러야 한다고 하셨다.

옷, 가방, 신발을 사라는 게 아니라 땅, 건물, 아파트를 꼭 사라고 하셨고, 이렇게 많은 자산을 가질 수 있었던 과정도 말씀해 주셨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속으로 말했다.


저도 건물 사고 싶어요.

지금 빚이 20억이랍니다. 헤헤


그러다가 옆 약국장의 재산에 대해서도 얘기를 해주셨는데, 규모도 컸을뿐더러 돈을 어마어마하게 많이 번다고 했다.

늦은 밤 포대자루에 돈을 쓸어 담고 있는 모습을 본인이 목격할 정도였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와! 진짜 부럽네요 했더니

구슬씨... 그게 부러워? 그런 거 부러워하는 거 아니야.

자기 주제보다 과분한 돈과 명예를 얻게 되면 꼭 안 좋은 일이 생겨.

옆 약국장은 그렇게 돈을 벌고 난 후 아내가 병으로 죽었고, 딸이 불치병에 걸려 현재 미국에 있는 병원에 누워있다고 했다.

아... 그래서 매번 사람이 힘이 없어 보였구나!

문제의 정답을 맞힌 듯했다.






나는 전남편이 딱 그러한 상황인 거 같았다.


그의 어린 시절 가정 형편은 괜찮은 듯했다.

아파트가 몇 채 있었고, 해외여행을 종종 다니며 크게 돈 걱정 없이 살아온 듯했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사업실패(내가 생각했을 때 사업실패 + 여자놀이)로 인해 아파트를 다 처분하고 시골 할아버지 댁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한동안 굉장히 어렵게 살다가 취직 후에 자기 분수에 맞지 않은 돈을 벌게 되면서 비극은 시작되었다고 본다.


각종 명품을 사들이고 외제차도 3대나 굴리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돈을 빌려주며 흥청망청 돈을 써댔다.

그러다가 투자까지 하게 되었고, 일이 터진 거다.

돈 무서운지 모르는 그에게 하늘이 벌을 내린 것만 같았다.

거기에 바람까지 피우면서 가정은 파탄이 났고, 그 벌은 고스란히 나도 함께 받았다.





별거 기간 3년,

나는 살기 위해 발버둥 쳤다.

아이가 마음에 걸려 선뜻 이혼하지 못하고 끌고 끌었던 별거 기간 3년 동안 떳떳한 엄마가 되기 위해 무단히 노력했다.

돈도 없으면서 일단 아파트 청약을 했고, 다행인지 안다행인지 당첨이 돼서 계약금, 중도금을 모으기 위해 악착같이 아끼고 모았다.

책상 아래 고이 모셔둔 샤넬백이 눈에 밟혔다.

팔자.

중도금에 보태자.

10년 전 전남편에게 받았던 샤넬백을 당근에 올렸고, 좋은 분께 판매할 수 있었다.

샤테크라는 말만 들었지 내가 당사자가 될지 몰랐다.

당시 구매했던 가격보다 정확히 2배 이상의 금액을 받고 팔 수 있었다.


항상 작은 숫자들로 채워져 있던 내 통장이 모처럼 풍족한 숫자들로 채워지게 되었다.


이혼 후 샤넬백을 팔고, 명품인간이 되기 위해 매일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공부하고 있다.

비로소 나는 진정한 사람이 되어 가고 있다고 느낀다.

이혼 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되도록 짧은 기간 동안 충분한 슬픔을 느끼고, 빨리 행복해지셨으면 한다.


최고 좋은 복수는 상대방 보다 더 잘 사는 거라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나는 최고의 복수를 하고 있는 중인 거 같다.





덕분에 중도금은 잘 해결되었고, 올해 11월 나는 새아파트에 입주 할 예정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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