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맛있게 끓이는 법
아버지가 중국에 계실 때, 항저우라는 도시에 머물었다.
나는 매해 여름과 겨울방학마다 그곳을 오갔다.
출장길이었던 아버지에게는 일상이었지만 나에겐 여행처럼 설레는 시간이었다.
어린 언니와 나는 그저 따라가는 연례행사라고 생각했지 그때는 몰랐다.
지금에서야 느끼는 건 그곳에 함께 행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깊은 사랑이었는지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싶다.
항저우에는 '서호'라는 호수가 있다.
우리 가족은 그 호수를 돌며 산책을 하고 배를 타기 전 포장마차에서 군고구마를 사서 나눠 먹고 용기내어
맛본 취두부 냄새에 코를 막으며 웃고 식사를 마치면 늘 차를 마셨다.
그땐 미처 어려 생각하지 못했지만 내 곁엔 늘 차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귀한 시간이었다.
처음 내가 차에 빠지게 된 건
공간에서 사람이 주는 정성 때문이었다. 화려하거나 비싼 기물도 물론 내 오감을 사로잡았지만
차를 우릴 때의 느린 손길, 마음을 다해 차를 내려주는 한 사람의 태도. 그런 공간에 있을 때면 늘 바쁘게 살아오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치열하게, 쫓기듯 하루를 살아내는 것을 즐기면서도 마음 한켠 어딘가에서는 느림의 미학을 겸하길 간절히 바라며 쫓아다녔나보다.
어릴 때부터 섬유를 다루시던 부모님 아래에서 자라 직접 만져보고 느껴보는 오감의 경험을 즐겼다.
차의 본질을 깊이 알기 전부터 취향을 담은 컵, 접시, 부드러운 패브릭 등 손에 닿는 사물들의 감촉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차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숨결이 살아있는 흙으로 빚은 다기, 그리고 수색을 감상할 수 있는 투명한 유리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차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내 취향도 또렷해졌다.
특히 중국 다예 수업은 저에게 일석삼조의 시간이었다.
차를 배우고 화려한 기물들을 접하고 심지어 다예 선생님과 뜻을 같이하는 동기 선생님들까지 만날 수 있었으니 일주일 중 수요일이 늘 기다려졌다. 그렇게 오감을 살아움직이게 해주는 기물이 좋아 시작했던 차 공부는 점차 차 자체를 사랑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건강하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자연스레 제 곁에 함께했다.
여전히 참 감사한 마음이다.
삶을 잘 우려내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계속 채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펙과 커리어, 주변 사람들로부터의 인정 그리고 뜻하지 않은 인간관계 등
외부의 기준에 맞춰 끊임없이 나를 채우려고 했다.
나는 차를 업으로 삼고 있으면서도 정작 나 자신을 우려낸 적이 없었다.
늘 급하게 데우고, 급하게 붓고, 심지어 급하게 들이켰던 날들이 가득했다
인생을 잘 우려내려면 무수히 많은 걸 외부에서 채우고 사회적인 기준에 맞춰 애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대로 우려낼 시 도 없이 급하게 데우고 붓고 심지어 급하게 들이키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몸과 마음이 따로 움직이면 아무것도 생산적이지 않다고 믿었고 결국 일과 내가 분리되지 않은 채 휴식할 줄 모르는 사람이 되어갔다.
게다가 사람들과 다양한 형태로 차를 즐기며 따뜻함을 나누고 싶었던 내 본질과는 다르게 차를 업으로 삼는다는 이유로 남들 기준에 맞춰 회사일에만 쫓기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처음엔 열심히 하는 모습이 잘 하는 모습으로 착각하게 되었고 점점 본질의 나와 다른 덩어리로 커져가는 스스로를 보면서 차를 업으로 삼고 있었음에도 정작 나 자신을 우려낼 시간조차 없이 깊이 몸과 마음을 담가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심히 깨달았다.
지난 6월 퇴사를 결정했다.
이제는 천천히 나를 감각하고 고찰하며 그런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즐기기로 했다. 그렇게 내 삶을 바라보는 진짜 나의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굳 이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우러날 수 있는 관계들이 있다는 걸, 그리고 내가 나를 사랑하고 귀히 여기기 시작하니 삶도 나를 그렇게 대해주기 시작했다는 걸 비로소 알게 되었다.
진짜 좋은 차는 열자마자 그 향이 깊고 짙게 퍼진다. 따뜻하고 오래 스며드는 순간들은 억지로 만들어내지 않아도 나를 진심으로 대할 때 자연스레 다가왔다. 나를 아끼고 보듬기 시작하니 내 삶도 내게 그렇게 풍부하고 조금씩 향기롭게 다가왔다.
어쩌면 어린 시절 아버지가 건네주셨던 그때의 향수는 서른을 앞둔 지금의 내가 내 삶을 잘 우려낼 수 있도록 더 깊고 단단한 뿌리를 내려준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내가 스스로에게 양분을 주며 내 삶을 단단히 지탱해야 할 때다. 유일한 선물같은 아무도 대신할 수 없는 나만의 시간이니까
오늘 아침 서호용정을 정성을 다해 천천히 우려 마시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차를 우리는 귀중한 인내의 시간처럼 나도 조급함 없이 천천히 정성을 다해 내 삶을 우려내고 싶다는 마음을 가졌다. 특별한 공간이나 화려한 무언가는 없어도 찻잔 속 내 마음을 비춰볼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조금씩 깊이 깨닫고 있다.
차는 늘 사람들 곁에서 다정하게 머문다.
형태는 달라도 결국 마음에 닿는 방식은 비슷하다. 어디서든 어떤 순간이든 가장 온전하고 특별한 시간이 된다. 언젠가 내 삶이 천천히 깊게 우러나 있을 때, 그동안 흘려보낸 모든 시간들이 그저 지나간 시간이 아니라 소중하고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다정히 바라보고 싶은 순간에 그 곁에 따뜻한 차 한 잔이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제는 그 마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좋은 차와 따뜻한 마음이 머무는 시간들을 함께 나누며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