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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 jeong Jul 23. 2021

언니는 왜 혼자 집에 못 있어?

뭐가 그렇게 좋아!

인생의 우여곡절을 많이 겪은 동생이 부자가 되었다. 사업체도 경영하고 60평대 아파트도 있고 다가구 건물도 건축 중이고 수입차도 타고 다녔다. 어머니의 병환이 심해져 호주에서 귀국한 나는 이민 가기 전의 동생 모습과 지금의 환경이 많이 달라져서 내심 부럽기도 하고 자랑스러웠다. 동생은 애들도 취업까지 했으니 한국에 들어와서 자신의 사업도 도와주면서 어머니도 자주 보면서 지내라고 했다. 요양원에 계시는 어머니는 생각보다 상태가 좋지 않았다. 가족과 상의 후 어머니를 지켜보면서 함께 지내기로 했다.

예전과 형편이 정말 달라진 동생이라서 정말 행복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며칠 함께 지내면서 많은 이야기를 했고 불행할 이유가 거의 없는데 행복하지도 않고 불면증에 우울증도 있다고 했다. 그래서 심리 상담을 받고 있다며 이름만 들어도 유명한 TV에 가끔 나오는 박사님으로 한 시간 상담료만 해도 상당히 비싸다고 했다. 상담 결과 모든 사람들이 먹고살만할 때 트라우마라는 무의식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면서 심리적, 정신적 변화가 생길 수 있다며 지속적인 상담을 통해 자신을 찾아가고 행복을 만드는 방법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고 했다.

어느 날 동생이 나에게 질문을 했다. ‘언니는 왜 집에 혼자 있는 것이 싫어?’ 글쎄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질문이라서 대답을 하지 못했고 많은 사람들이 혼자 집에 있는 걸 싫어하지 않을까?라고 했더니 이유가 있을 거라며 잘 생각해 보라고 했다.

아주 많이 단순한 성격인 나는 부부 싸움을 해도 침대에 누우면 1,2분도 지나지 않아 잠들어 버리는 무엇이든 깊게 생각하지 못하는 성격이다. 아주 평범한 나의 가족과 나의 일상임에도 동생의 눈에는 자신을 전혀 알지 못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언니로 보인다며 내가 하는 생각들 행동들에 대해서 잘 살펴보라고 했다.

책도 권해주고 나에게 질문하는 방법과 내 안에 있는 나를 찾아서 위로하고 대화하고 왜 집에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하는지 물어보라고 했다.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동생의 도움으로 16평 아파트에 혼자 살게 되었다. 처음엔 무섭고 뭔가 불안한 생각이 들어서 동생 집에 거의 머물다가 3개월이 지나면서 혼자 지내게 되었다. 그러면서 내 안에 다른 내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나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태어나서는 자식으로 살았고 20대 후반부터는 자식이면서 한 남편의 아내로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았지 나로 살아본 적이 없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단순한 나도 생각이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다. 왜 혼자 있는 것이 싫은지 묻고 또 물었다 나에게.

처음 대답은 ‘재미도 없고 심심하잖아’였다. 또 물었다. 지속적이고 반복적이며 끈질기게 질문을 하던 어느 날 내 안에 숨어있는 아주 어린 나를 보았다.

우리 집은 대가족이었다.  큰 아버지는 결혼해서 딸 셋을 낳았다. 아들을 낳기 위해 두 번째 큰엄마가 들어오셨고 그 큰어머님이 아들 셋을 낳았다.

두 번째 며느리인 어머니는 큰딸을 낳고 둘째인 나를 임신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어머니에게 ‘아가야 이번에는 내 태몽 꿈이 아들이다. 걱정하지 마라 아들이야!‘라고 하셨다고 들었다. 첫 딸과 다르게 태동도 요란해서 내심 아들을 기대했던 어머니. 뱃속에 태아인 나만 알고 있는 딸. 심리학적으로 보면 그때부터 나의 불안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했다. 내가 태어난 이후부터 할머니는 아들 잘 낳는다는 사람들의 사진을 아버지에게 보여주기 시작했고 우리 가족의 불행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집안 분위기상 불행 인지도 모르고 살았고 이불공장을 했던 우리 집은 일하는 사람들도 많았고 20명 가까이 되는 가족들까지 나를 바라볼 때마다 한 마디씩 했다. ’ 고추 좀 달고 나오지 그랬어.‘ 그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초리를 감당하기에 너무 작고 어린 나는 집이 싫다고 생각했다.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밖에서 놀았고 저녁 먹고 잠자기 위해서 필요한 공간이 나에게는 집이었고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집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서울로 분가를 한 우리 집은 우리 가족만 있는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내 어릴 적 무의식에 있는 집에 대한 개념은 바뀌지 않았다.

학교 끝나고 동네 아이들과 고무줄놀이를 하면 실력이 뛰어난 나는 양 팀에서 서로 나와 편이 되려고 했고 심지어는 늘 깍두기(양편에 모두 속해있는 사람)였다. 밖에만 나가면 나의 존재는 최고였다. 공부도 주목받고 어머니에게 칭찬도 받으며 나의 존재를 높이는 최고의 선택이므로 늘 상위권을 유지했다. 취업 후 회사에는 만여 명이 넘는 직원에 수 백 개가 넘는 지점에서도 실적은 늘 상위권을 유지했다. 급여 차이가 전혀 없는 실적이지만 존재감이 높아지는 것만으로도 나의 노력은 힘든 줄도 모르고 계속되었다. 출근도 일찍 해서 내 주변은 물론 상사나 동료들 자리까지 정리 정돈했다, 청소 아주머니까지 늘 최고의 직원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게 매일 생활하다 보니 늘 우수 직원에 뽑혔고 모든 직원에게도 잘 대했다. 퇴근 후 집에 오면 저녁식사 후 나의 에너지는 고갈되어 바로 잠자리로 이어졌다.

집은 나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는 어릴 적 무의식이 만들어낸 공간이라서 그곳에 혼자 있다는 건 불안이고 밖으로 나가서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 속에서 있을 때 나의 존재는 살아나고 빛이 난다고 생각했다.

결혼하고 남편과 아이들은 부지런하고 사랑이 넘치는 아내와 엄마로 늘 따뜻한 눈빛을 내게 보냈음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는 존재감을 높이기 위한 공간에 불과했다.  늘 노력했고 초저녁만 되면 녹초가 되었다. 나이가 들고 상황이 바뀌고 주변 환경이 바뀌어도 집에 대한 무의식의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내가 무의식을 한 번도 들여다보지 못했기 때문에 전혀 알 수 없었던 건 당연한 일이다.

어느 날 아들이 아빠는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물었다. 남편은 엄마라고 말했다. 순간 나는 그 말을 듣고 놀라기도 했지만 속으로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들도 ‘친구들 엄마하고 우리 엄마와는 많이 달라 엄마 정말 존경해.’라고 덧붙였다.

그런데 내가 남편과 이이들에게 최선을 다한 건, 매일 종종거리며 하루를 뛰어다닌 건 나의 존재감을 높이기 위한 노력이 우선이었고 가족사랑은 그다음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한다면 존재감이 최고이면 그것으로 나는 만족한 삶이었다. 이것을 인정하기까지 눈물도 많이 흘렸고 나의 삶 자체가 다 허구인 것 같아 혼란스러웠다. 가족을 사랑하고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며 꾀나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던 나에게 정말로 잔인한 결론이었다. 무의식을 덮어버리고 싶었다. 부정하고 싶었다. 가족들은 심리 결과나 무의식이 100% 맞는 건 아니고 통계라며 위로를 했고 당신은, 엄마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고 위로했지만 왠지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무의식의 나를 알았다고 나의 생활이 쉽게 달라지진 않았다. 다만 내가 하는 행동들을 인식하고 지켜보며 나에게 물어볼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한 발전이었다. 그 행동이 무의식의 나라면 ‘이제는 그럴 필요 없어. 어른이 된 제인을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인의 존재를 소중하게 생각해,’라고 말하면 노력하지 않고 가볍게 생활하게 된다. 몸에 늘 달고 다니던 모래주머니 하나가 떨어져 나간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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