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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 jeong Mar 25. 2023

터널을 빠져나왔다

야생 고양이 수수

남편이 며칠 전부터 마당의 꽃을 꺾는다.

가끔 화병에 꽂기도 했지만 주변을 둘러보아도 꽃이 보이지 않는다.

오늘도 남편이 하얀 넝쿨 꽃을 꺾더니 어디론가 걸어간다. 우연히 오른쪽 창밖을 보다 왼쪽으로 꽃을 들고 걸어간 남편의 모습이 창에 비친다.

큰 나무 앞 돌무더기 위에 꽃을 올려놓고 한참을 서 있다 돌아오는 남편.


아! 수수의 무덤임을 알았다.

그곳에 한 번도 내려가 보지 못한 나는 갑자기 모자를 쓰고 밖으로 나왔다. 마당에 필요한 잡다한 물건을 담아두는 바구니에서 꺾꽂이 가위를 꺼냈다.

극락조 3송이와 빙카 흰색을 여러 줄기 자르고 빨간 제라늄과 이름을 몰라서 내가 지어준 나팔꽃과 훌라춤 꽃도 굵은 줄기에 꽃이 활짝 핀 가지를 잘라서 수수 무덤으로 내려갔다.

큰 나무 앞에 제라늄으로 둘러싸인 꽃밭이었다. 다른 동물들이 혹사라도 파헤칠 염려가 있어서 돌로 잘 눌러야 한다고 유*브에서 보았다고 하더니 잘 덮여 있었다.

주변에는 남편이 매일 가져다 놓은 꽃들이 시들었지만 마른 꽃잎 위에 따뜻한 햇볕이 앉아서 나를 반기는 듯했다.

꺾어온 꽃들을 수북이 올려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밝은 미소를 수수에게 보여주었다.


오래전 혼자 여수행 기차를 타고 가던 중 창밖에 시선을 빼앗겼던 적이 있었다.

길고 짧은 터널들을 지날 때마다 어둠과 밝음이 교차했다. 마치 연극 무대의 막을 내렸던 어둠과 다시 켜지는 조명처럼 까만 터널을 지나면 새로운 풍경들이 연극처럼 펼쳐졌던 기억을 끄집어냈다.

누군가의 표현처럼 인생은 한 편의 연극과 같다고 했던가!


이제 나도 길고 긴 터널을 지나오니 가을비가 투둑투둑 지붕에서 말을 건다.

햇볕을 싫어하는 화초들이 처마 밑에서 갈증을 줄기 끝까지 밀어낸다. 그들을 비와 만나게 해 놓고 의자에 앉는다. 긴 터널을 지나오니 가을이 마당에서 서성인다. 로즈메리에 다닥다닥 붙어있던 보라색 꽃들은 어디로 갔을까? 꽃을 안아본 적도 없다는 듯 시치미 뚝 떼고 푸르게 서 있는 나무가 조금은 쓸쓸해 보인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라 했던가!

다음 주부터 많지는 않지만, 마당에서 몇 가지를 수확해야겠다.



한 줄 요약: 슬픔이 찾아오거든 참지도 덮지도 누르지도 말고 충분히 함께해야 후유증이 없다.


*공감으로 함께 마음을 나누고 위로를 보내주신 작가님들 덕분에 수수를 잘 보내고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정말 큰 힘이 되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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