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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출장 - 느림이라 불리는 여유

언제나 긍정 그리고 미소

by 김지혜

17개국의 활동 기반 교육을 연구하는 트레이너들이 참여한 필리핀 워크숍

필리핀 카 가안 데 오르에서 진행된 1주일간의 워크숍을 마치자마자 토요일 나는 가장 먼저 귀국 비행기 스케줄로 출발하는 멤버였다.

토요일 5시에 워크숍이 마치면 바로 출발하는 저녁 비행기를 예약했다.

태풍이 필리핀에 온다는 이야기도 듣고, 태풍의 영향이 마닐라에 있을 거라고 들었지만 몇 시간이면 해결될 줄 알았다. 태풍에 익숙한 한국도 거의 폭풍우가 몰아쳐도 하루면 거의 사라진다는 나의 경험, 그리고 그 경험에 따른 가정이었다.

카가얀 데 오르에서 택시를 타고 미터기에 찍힌 대로 주면 된다고 해서 현금을 준비하고 공항으로 향했다.

예전 마닐라 여행하면서 뻔히 호텔이 보이는데 호텔을 빙빙 돌며 데려다주지 않는 택시를 경험

한 적이 있어 구글 맵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두 시간 전에 적어도 공항에 도착하려고 했던 스케줄이었는데 택시는 오기로 한 시간보다 15분 늦게 오고, 퇴근시간이 겹쳐 차가 막히는 바람에 1시간 전에 겨우 도착했다.

미터기에 765페소가 나와서 1000페소를 지불했는데 거스름돈은 150밖에 안 준다.

내가 뭔가 이상하다고 거스름돈 더 달라고 했더니 현지 말로 화를 내며 동전 몇 개를 더 준다.

나중에 현지 친구에게 물어보니 여기는 그렇게 팁처럼 거스름돈을 덜 받는 게 일반적이란다.

난 세상 쪼잔한 외국인이었다.

공항에 오자 마자 보이는 건 수많은 사람들이었다.

다행히 필리핀 에어라인에는 줄이 없길래 기쁘게 뛰어갔는데 비행기가 취소되었단다.


마닐라에 태풍으로 마닐라 향 비행기는 모두 갈 수가 없었다.

다음날 오전 비행기로 변경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와야 했다.

현지 친구가 알려준 데로 한국 공항 리무진 같이 운영되는 밴 티켓을 파는 부스로 갔다.

밴 티켓 판매원은 지금 비행기가 취소되어 다음 밴이 언제 올지 모른다고 한다.

뒤에 있는 밴은 뭐냐고 했더니 계약된 손님들만 받는 밴이란다.

그리고는 자기 차로 데려다줄 수 있다면 부스 옆에 있던 현지인은 1200 페소를 요구한다.

내가 공항까지 올 때 765 였는데 완전 바가지다.

다른 부스로 가서 다른 버스를 알아보자 나를 데려다주겠다던 그 사람이 계속 따라다닌다.

그리고는 모든 부스에서 택시를 이용해야지 표가 없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아마도 그 차를 어떻게든 이용하게 하기 위해 모두들 짜고 나에게 표를 팔지 않는 느낌이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바꾸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내가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 현금을 지불하는데 현지 돈이 모자랐다.

그 현지인에게 나를 더 이상 따라오지 말라고 하고 현지 친구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친구들이 도착하면 돈을 들고 있겠다고 했지만 뭔가 바가지를 씌우는 그 차를 타고 싶지 않았다.

친구가 나를 데리러 오기에는 함께 워크숍을 진행했던 다른 동료들을 챙겨야 해서 너무 바빴다.


착하고 안전해 보이는 현지인이 앉아 있는 밴치의 옆자리에 앉았다.

밴치에 앉아 있는 현지인에게 근처에 혹시 호텔이 있는지 말도 안 되는 질문을 건넸다.

누가 봐도 사방이 컴컴한 공항 근처에는 호텔이 없었다.

나의 상황을 옆에서 계속 듣고 지켜본 현지인은 자기 오빠가 자기를 데리러 올 테니 같이 타고 호텔 근처까지는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택시가 많은 곳에 내려줄 테니 그곳에서 미터기로 가는 택시를 타라고 했다.

친절한 현지인의 오빠를 기다리면서 한국 이야기도 하고 SNS 친구도 맺고 다음에 선물을 보내주기 위해 집 주소와 연락처도 받았다.

덕분에 나는 안전하게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다.

현지의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면을 동시에 경험하는 순간이었다.


다음날 오전 6시 비행기로 다시 예약되어 몇 시간 만에 다시 새벽 3시 30분에 호텔에서 출발 예정이었다.

몇 명의 유럽인들과 공항으로 출발하기 위해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택시는 3시 40분이 넘어서야 왔다.

현지 오거나이저에게 몇 번이고 제시간에 오게 해달라고 부탁했던 유럽인은 약간 화가 나 있었다.

5시 50분 비행기였던 그는 자칫 늦으면 체크인 자체를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상황이었지만 계속 전화는 하는 현지 오거나이저 친구에게 미안했다.

현지 친구는 이런 상황을 고려하여 3시 10분에 오라고 했는데 택시가 결국 3시 40분에 도착한 것이다.

택시를 타고 가는 중에 결국 유럽인들은 비행이 취소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나의 비행은 취소되지 않았다.

나는 원래 카가얀 데 오르-마닐라-인천의 여정이었지만 최대한 빠른 일정을 바꾸어 카가얀 데 오르- 세부- 마닐라 -인천으로 다시 예약을 했다.

하지만 마닐라의 태풍은 아직도 머물고 있는지 세부까지는 가능하지만 세부에서 마닐라는 장담을 못한다면서 나에게 세부까지 갈 것인지 말 것인지 정하라고 한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세부에 무작정 가서 기다리다 마닐라 출발 한국행을 그냥 보내버릴 것인가 아닌가. 뭘 어쩌란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다음 빠른 예약 날짜를 잡아 달라니 모두 예약이 꽉 차서 2일이 지난 뒤에나 예약이 가능하단다.

나의 비행 일정을 세부에서 마닐라 거치지 않고 바로 가는 것으로 바꿔 달라고 했더니 안된단다. 일요일이라 티켓 오피스가 문을 닫아서 월요일 되어야 가능하단다.

어느 것도 당장 가능한 것이 없다. 멘붕이 왔다.

두 번째 출국 시도 실패! 일단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함께 워크숍에 참여했던 모든 동료들이 멘붕에 빠졌다.

일정을 변경하기도 하고 일정을 미루고 이참에 놀다 가겠다는 친구도 있었다. 계속 일정을 체크하며 육로로 이동하여 다른 공항을 이용하겠다는 친구도 있었다. 태풍의 경로 반대방향으로 비행기 티켓을 변경한 친구도 있었다.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린 모두 각자의 결정에 따라 이곳에 왔다.

결국 모두가 각자 자기의 티켓을 알아서 찾아 자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지금 티켓을 버릴 수 없다는 생각에 난 계속 공항에서 직원에게 다시 알아보라고 하고는 결국 아무런 소득 없이 왔다.

다른 동료들은 다들 인터넷으로 다른 방안을 찾고 있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카운터에서 이틀 뒤에나 티켓이 있다고 했는데 당장 내일 티켓이 인터넷에서는 판매되고 있었다.

지금 티켓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그냥 다시 구매해야겠다는 결심을 그제야 한다.

왜 진작에 생각하지 못했을까, 마닐라만 안 가면 되잖아. 그냥 세부로 가서 세부에서 한국으로 가는 다름 날 항공사 티켓을 인터넷으로 구매했다.

결국 워크숍 끝나고 가장 먼저 출발하려고 했던 난 뒤늦은 결정으로 인해서 가장 늦게 가게 되었다.


이번 1주일 간의 워크숍은 내가 겪을 수 있는 필리핀의 많은 변수들을 경험할 수 있었던 여정이었다.

하루는 시 전체에서 수도관에 문제가 생겨 물공급이 안되었다.

오후 2시 정도부터 시작된 단수는 밤 12시가 넘어서까지 물이 안 나왔다.

필리핀 수도 수리 공고.jpg

샤워도 못하고 결국 생수를 떠서 양치와 세수만 겨우 하고 잠이 들었다.

리조트에서는 이미 익숙한지 콘퍼런스 룸 옆의 화장실에는 커다란 통에 물을 가득 담아 놓고 바기지를 두었다. 화장실 물을 내리려면 바가지로 물을 펴서 내려야 했다.

필리핀 현지 친구들은 익숙하다는 듯 놀라지 않았다.

리조트 내 룸 외 외부 시설 화장실에는 변기 위 플라스틱 좌석이 없다. 다른 친구들에게 묻자 모두들 스쾃 자세로 해결한다고 했다.

워크숍이 진행되는 일주일간 머물 리조트는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아침 식사를 즐길 수 있는 뷰에 오전 오후 간식처럼 맛난 열대 과일이 서빙되었다. 나름 괜찮은 리소트 시설을 갖춘 곳이었지만 현지의 사정은 좋은 리조트도 똑같이 겪어야 할 일이었다.


필리핀에 온 기념으로 하루는 한 시간 떨어진 해변가에서 진행되었다. 모래사장이 있는 해변가에서 반나절의 워크숍을 진행하고 잠시 휴식을 취할 시간을 주었다.


물론 물을 싫어하는 난 어느 것도 이용하지 않았지만 바닷가의 반나절의 워크숍은 수영복을 입은 채 워크숍을 진행하는 유럽인들을 보며 문화적 차이를 경험했다.

아시아 인들은 연신 수영복을 입고 토론을 하는 친구에게 혹시 타월이 없냐고 물었다.

아시아인이 의미하는 건 몸을 좀 덮으라는 말이다.

유럽 친구는 타월이 있다고만 하고 그냥 수영복을 입은 채 계속 토론을 이어나갔다.

유럽인의 수영복 차림의 워크숍보다 더 놀라웠던 건, 주위를 서성이는 개들과 고양이들이 너무나 깡말라 있다는 것이었다.

출산을 한지 얼마 안 된 엄마 개는 젖을 주어야 하는지 축 쳐져 있었지만 너무나 말라 있었다.

매번 살이 쪄서 살 빼기 위한 목적으로 산책을 나가는 우리 집 콩이와 너무나 대조적이다.

왜 이렇게 강아지들이 모두 말랐냐고 물었다.

사람들도 먹을 게 없는 환경에서 강아지에게 줄 먹이는 없다고 했다.

한 아이가 근처를 서성이고 있긴 했지만 외국인을 보고 신기해서 그런 줄로만 알았다.

오전 해변 워크숍을 마치고 리조트에서 가져온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고 모두 바닷가에서 책을 읽거나 썬텐을 하거나 수영을 하거나 일을 하며 각자 시간을 보냈다.

짐을 챙겨 마무리하고 돌아가는데 우리가 먹다 남은 도시락 플라스틱 쓰레기를 그대로 두었다. 쓰레기를 챙기려 했더니 현지 친구가 그냥 두고 오라고 했다.

이유는 남은 음식을 아이들이 먹고 치울 거라며 그냥 두면 된다고 한다.

리조트에서 풍성한 해물과 음식을 매일 먹었는데 누군가는 먹을 게 없고 굶고 있다는 현실, 큰 빈부의 격차가 존재하는 곳이었다.

17개국의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과 함께한 1주일간의 필리핀 워크숍;

유럽인 한 친구는 글루텐을 먹을 수 없어 밀가루가 들어간 음식을 먹지 못해 유럽인임에도 생선과 밥만 먹는 친구도 있었다.

핸드폰 로밍을 해왔지만 느려서 별 소용이 없었고, 호텔 내 와이파이는 쿠폰을 12시간마다 새로운 비번을 받아 접속해야 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주 느린 인터넷으로 일을 해야 했고 일정 중 온라인 미팅이 없다는 게 참으로 다행이라 여겼다.


이번 워크숍은 멋진 리조트에서 진행되었지만 필리핀의 현지 환경 IT, 물공급 문제와 빈부격차를 경험했다.

또한 필리핀의 태풍으로 비행기를 탈 수 없어 몇 번씩이나 공항에 헛걸음을 했다.

워크숍 하는 도중 어떤 남쪽 섬에서 6.5 지진이 났다는 대사관 문자도 받았다.

필리핀의 자연환경이 어떤지도 느낀 한 주였다.

외국인을 바가지 택시에 태우려 똘똘 뭉친 야바위 꾼들도 만났다. 하지만 그 순간 정말 친절한 현지인을 만나 현지 돈이 모자란 가난한 한국인을 호텔 근처까지 대려다 주었다.

지역의 최고 대학교에서 진행되는 콘퍼런스는 시작시간에서 20분 정도 늦게 시작되었고, 택시 운전사도 원래 오기로 한 시간보다 30분이나 늦었다. 현지의 시간 개념도 경험했다.


한국인으로 이런 환경에서 느끼는 감정은 '느림'이다. 내가 사는 한국은:

빠른 인터넷, 약속 전에 도착해 있는 차량과 사람들, 어디에 오는지 보이는 5분 내 도착하는 호출 택시

어떤 변수들이 있어도 대체할 수 있는 설루션이 존재한다. 예상하지 못한 변수에도 잠을 줄여가며 계획된 것들을 며칠 안에 마무리할 수 있는 환경이다.

상황에 맞는 대안과 인프라가 갖추어지고 그만한 속도를 내며 살아온 우리의 삶의 방식이다.

결국 좋은 환경 속에서 무언가 해내지 못한 건 나의 부족함 때문이다.


한국의 익숙한 삶에서 잠시의 필리핀 경험은 '느림'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느림'이라 정의해버리는 그 삶의 방식을 그들은 느림이 아니라 여유와 긍정으로 인식한다.

내게는 낯선 어려움이지만 그들은 긍정적 마인드와 미소와 여유를 잃지 않았다.

워크숍을 마치고도 일을 하는 나에게 삶의 여유를 가지라 조언한다.

6.5의 지진에도, 태풍으로 비행기가 뜨지 않아도, 다급한 나에게 내일은 괜찮을 거라 위로하며 일단 밥 먹고 다시 같이 티켓을 찾아보자며 밥부터 챙겨 먹인다.

한국인이 실천해온 노력, 이러한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은 성장을 가져왔다.

하지만 노력에도 불구하고 바꿀 수 없는 현실의 경험은 현실 수용이라는 또 다른 적응방식을 낳았을 것이다.

이곳의 친구들이 사는 방식은 분명 현지에 가장 적절하게 진화해 왔을 것이다.

더 잘 갖추어진 환경 속에서 사는 우리는 더 바쁘고 더 많은 것들을 해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적 제약은 그리 많지 않다. 나의 역량이 부족해서 결국 할 수 없는 것들만 보인다.

언제나 부족해 보이는 나에게 나를 향한 긍정의 마인드는 쉽게 생겨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보다 미소가 적다.

나의 기준에서 느끼는 느림은 결코 현지 문화에서 바라보는 정의가 아니다.

여유를 좀 가지라고, 그래도 괜찮을 거라고, 진정하라고 말해주는 그들의 긍정 마인드와 미소!


내가 가진 문화적 차이는 부정적 정의로 다가오지만 그때 다시 한번 살펴보자.

내가 가진 현지에서 부정적 인식은 무엇인가?

현지의 환경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서로 다른 문화는 각자의 환경에 맞추어 진화했으며 그 문화는 그시대 그 상황에서 가장 맞는 문화일 수 있다.


내일은 꼭 한국 가는 비행기가 뜨기를 바라며 필리핀 출장 작은 에피소드들을 남겨본다.


https://www.youtube.com/c/thewiserTV/vide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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