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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성비보다 잊지말아야 할 관계의 가치

오이하나의 가치

by 김지혜

집 인근에는 가성비 좋은 대박 야채 가게가 있다. 마트나 인터넷보다 저렴하게 판매해 늘 초저녁이면 야채나 과일이 대부분 팔려 없을 정도였다. 가끔 들러 야채도 사고, 제철 과일도 저렴하게 샀던 곳이다.

그런데 최근, 불과 100미터 거리에 간판조차 없는 새로운 야채 가게가 생겼다. 오픈 이벤트로 파를 한 단에 500원에 판매했다. 시끌벅적하게 손님이 북적이는 야채가게를 보며 나도 사고 싶었지만 줄이 너무 길어 사지 못했다. ‘이 오픈 이벤트가 끝나면 가격은 올라가겠지’, ‘오픈 열기가 줄면 다시 예전처럼 조용해지겠지’ 생각하며, 나는 계산이 한가할 즈음 다시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며칠 뒤, 오이를 사려고 대박 야채 가게로 향했다. 새로 생긴 가게보다는 계산도 빠르고, 무엇보다 새 가게로 인해 상심했을 사장님을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쓰였다. 대박 야채가게는 정말 손님이 부쩍 줄어 있었다. 분명 새 가게의 파격적인 가격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이 저 저거 더 많이 살 것 들을 찾으며 '잘 왔다'는 생각했다. 사장님의 표정은 예전 같지 않았다. 계산대에서 혼잣말처럼 흘러나오는 한숨과 불만 섞인 말투에서, 경쟁 가게에 대한 스트레스를 느낄 수 있었다.

오이는 3개에 천 원이었다. 평소보다 저렴한 걸 보니 제철이거나 판매가를 낮춘 듯했다. 그렇게 장을 보고 가게를 나서는 길, 새로 생긴 가게 앞을 지나치게 되었다. 그런데 그곳의 오이는 4개에 천 원이었다. 오픈 행사가 끝났는데도 가격이 여전히 더 저렴했다.

내가 대박 가게에 갔던 이유는 그동안 그곳에서 구매하며 나름 만족하고 있었고, 약간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에 든 생각은 복잡했다. '내가 굳이 비싼 곳에서 샀어야 했나? 그 가게 사람들은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내가 어떤 마음으로 왔는지도 모를 텐데.' 순간 나는 혼자만의 쓸데없는 의리를 지킨 것 같았다. 오이가 3개든 4개든 내 일상에 큰 차이는 없다. 어쩌면 하나는 결국 먹지 못하고 버릴 수도 있다.

이렇게 사소한 가격 차이를 이겨내는 힘은 바로 '관계'다. 하지만 그 관계가 일방적이라면, 내가 아무리 마음을 써도 상대방이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 관계는 결국 나만의 감정 소비가 된다. 대박 가게는 나를 모른다. 내가 그들에게 어떤 마음을 품고 다시 찾아왔는지도 모른다. 손님이 줄어든 스트레스에 예전 같은 미소도 사라졌다.

관계에는 분명 가치가 있다. 야채 가격의 차이는 크지 않다. 오이 하나의 차이일 뿐이다. 하지만 나의 가치 판단은 한없이 가볍게도 오이 하나에 흔들린다. 만약 평소에 인사를 주고받고, 나를 기억해 주는 관계였다면 어땠을까? 이름을 알고, 가족 안부도 묻는 사이였다면 나는 새 가게로 가야 하나에 오이 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각하며 갈등했을 것이다.

이전에 살던 아파트 앞 마트에는 그런 직원이 있었다. 포인트 적립을 위해 알려준 핸드폰 번호 뒷자를 기억했고, 아이들과 함께 오면 누구 아이인지 구분하며 인사를 건넸다. 아이들끼리 가면 '엄마는 요즘 안 보이시네, 바쁘신가 봐?'라고 하고, 내가 혼자 가면 '둘째가 요즘 아이스크림 사러 안 오는데 잘 지내죠?'라고 하며 안부를 묻던 분이다. 아주 가끔 가는 친정 엄마까지 기억하며 열무김치를 담그겠다며 열무를 사갔던 친정엄마 열무김치는 먹었냐고 묻기도 했다. 정말 놀라운 기억력을 가지신 분이셨다.

그 관계는 언제나 따뜻하게 느껴졌다. 만약 그 직원이 주인이었다면, 어땠을까?

새로운 경쟁 가게가 옆에 있다면 구분에게 들킬까 봐 다른 가게에 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얼마의 차이가 나야 그 직원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다른 가게에 가야겠다고 선택했을까? 오이의 가격차라고 해보자. 두 배, 세배 가격, 여전히 상상 만으로는 결정하기 힘들다. 그런 가격 가격차에서 사야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해도 여전히 불편할 것이고, 그 관계를 깨고 싶지 않아 사지 않거나, 아예 멀리 그 분과 마주치지 않는 다른 가게를 이용했을 수도 있다.


작은 야채 가게에서 이뤄지는 일상의 선택 안에도, '고객과의 관계'의 가치는 상당히 높다.

관계는 쌓는 것이지, 생긴다고 자동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내가 혼자 만들어낸 관계는 그 가게가 인식하지 못하면 쉽게 무너진다. 고객은 자신이 기억되는 순간, 관계의 가치를 느낀다. 겨우 오이 하나에 돌아설 만큼 대박 가게의 고객관계 관리 (CRM 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의 가치는 가벼웠다.


1975년 뉴욕의 한 해변에서 진행된 한 심리 실험이 있다.
연구자는 해변에 라디오를 두고 자리를 비운 뒤, 공범이 라디오를 훔치는 척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단, 실험 대상자에게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비운 경우엔 단 20%만이 도둑을 막으려 했지만, “잠깐 라디오 좀 봐주시겠어요?”라고 한마디 건넨 뒤 자리를 비운 경우엔 95%가 적극적으로 도둑을 제지했다.

고작 한 마디, 작은 부탁 한 번이 사람에게 “관계”와 “책임감”을 만들어낸다.
관계를 맺는 순간, 타인의 행동은 달라지고, 행동의 무게는 달라진다.


관계가 쌓였을 때, 고객은 더 이상 단순히 ‘가성비’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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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janekim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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