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력없는 나는 싫어하지만 열심히 하는 나를 싫어하진 않는다.
통역사가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무엇일까?
통역을 하러 갈 때는 받지 않지만 통역일을 한다고 하면 자주 받는 질문 중 하나는
통역사면 영어 잘하겠네요?
난 사실 영어를 잘한다고 생각해 본적이 거의 없다.
내가 아무리 영어 공부를 열심히 한다 해도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원어민이 될 수 없다.
아직도 내게는 아는 영어보다 모르는 영어가 더 많다.
난 순수 국내파 영어 통역사다. 사실 난 영문과를 졸업한 것도 아니다. 유학이나 어학연수를 해본 적도 없다.
영어를 중1 때 처음 ABCD부터 배웠다. 첫 영어 선생님은 60세 남자 선생님이셨다.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쳐 주셨다. “자 따라 하세요. 구드 모닝 그.”
나 같은 통역사는 욕도 외워야 알아듣는다.
한마디로 내가 아는 영어에서 거저 듣다 보니 알게 된 영어라고는 없다. 100프로 학습에 의한 것이다.
난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외국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외국에 실컷 가볼 수 있는 가이드가 되고 싶었다. 영어 통역 가이드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해서 결국 자격증을 땄지만 외국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나를 가이드로 채용해 주는 곳은 없었다. 심지어 졸업하니 IMF 경제 위기로 환율도 2000원 가까이 오르고 많은 여행사도 문을 닫았다.
해외에 한 번도 가본적 없는 가이드를 따라 누가 감히 해외에 가보고 싶겠나!
현실적으로 한 번만 생각해봐도 알 것 같은데 어리석게도 당시 난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영어 통역의 경험을 얻기 위해 해외 입양 단체에서 봉사를 하고 국제 행사에서 통역 봉사자로 활동했다.
통역사라는 직업은 순수 국내파인 나에게는 적성이나 재능 자체가 맞지 않을 수 있다.
왜 그랬을까? 당시 난 내가 하기 힘들겠지 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남들보다 느린 거북이라는 걸 알지만 여전히 스스로에게 가능할까라는 질문조차 던지지 않았다.
통역일을 시작한 첫해 LG 전자에서 영국 교육생에게 기계의 작동 원리 교육 통역을 할 때였다.
통역 중에 강사가 '추동력'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영어로 뭔지 몰랐다. 사실 한글의 추동력이라는 뜻도 정확하게 이해하질 못했다. 당시 아직 경험이 많지 않았던 난 20명의 영국 교육생 앞에서 모르는 단어를 찾아볼 용기는 없었다.
내가 그 단어를 듣고 당황하자 강사님은 '관성'이랑 비슷하다고 했다.
'관성'은 물체가 움직일 때 그 움직임을 계속하려는 성질이다. 그래서 '추동력'이라는 단어 대신에 그 뜻을 넣어서 통역했다. 즉 '추동력'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This is the property of objects that causes the object to keep its own movement) 이 긴~ 정의를 넣어서 통역을 한 것이다. 한 단어 때문에 전체적인 영어 문장이 엄청나게 길어진 것이다.
당시 뒤에 담당 과장님이 상황을 알아차리고 단어를 찾아서 나에게 알려준다.
다른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작은 소리로 하지만 내가 알 수 있도록 최대한 큰 입 모양을 보여주신다.
Impetus! impetus!

나는 그 과장님께 알아 들었다고 ok 사인을 보내고 ‘추동력’이란 단어가 나오자 자신 있게 통역했다.
하지만 난 impetus를 Impotence로 잘 못 알아 들었다. Impotence는 ‘발기부전’이라는 단어다.
당시 수업을 듣던 영국 교육생들은 난리가 났다. 웃느라 수업을 중단해야 했다.
기계가 ‘발기부전’의 힘으로 움직인다고 통역한 것이다.

나의 통역 첫 해 있었던 가장 큰 사고였다.
20년 가까이 무역/통역/강의 등 영어로 먹고사는 일을 하는 지금,
내가 가장 많이 하는 통역분야는 기술과 엔지니어링 분야이다. 지금도 활발하게 기업체에서 기술 전문 세미나와 교육, 감사(audit)를 전문으로 통역한다.
통역 첫해의 그 굴욕사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쪽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통역사가 되었다.
지금도 내가 하는 통역의 80%가 전문 엔지니어와 기술력을 가진 전문 인력과 일을 한다.
초기 어려운 통역을 할 당시, 다시는 이런 분야를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려운 용어와 원리를 이해하느라 통역 자료를 새벽 3시까지 매일 보곤 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욕하면서 공부했던 그 분야가 지금은 나의 가장 큰 무기가 되었다.
국내파임에도 많은 해외파, 통역대학원을 졸업한 통역사들 사이에서 내가 당당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바로 그 이유다.
내가 선택한 어려운 주제의 통역은 영어 영재도 어차피 공부해야 한다.
그 분야의 통역이 너무 어려워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던 건 나뿐 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 내가 더 많이 공부하면 더 잘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음을 의미했고 결국 나는 그 분야 전문 통역사가 되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한 가지만 잘하면 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내가 한 분야에 정말로 많은 노력을 해도 어딘가에는 여전히 나보다 잘하는 사람은 참 많다.
나에게 정상까지 가는 엘리베이터라는 타고난 재능도 없고 누군가 헬리콥터로 나를 꼭대기에 꽂아 주는 금 수저도 아니다.
누가 봐도 거북이었던 난 하루하루 걸어가기에도 벅찼다.
거북이처럼 정상을 쳐다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목을 가졌고 잠시 올려다보면 목이 아프다.
잠시 올려다본 것뿐인데 해봐도 안될 것 같다는 생각만 많아진다.
그래서 난 바닥을 보며 매일 같이 내게 주어진 일과 기회들에 집중하기로 했다.
프리랜서는 잠시, 단기간 고용을 의미한다.
프리랜서 시장에서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열심히 하는 사람은 천지다. 우리는 실력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실력이 없는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열심히 하는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늘 1시간만 고용하고 언제 다시 일할지 모를 사이라도 고객은 다시 안 볼 결심을 하진 않는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와 잘 맞는 사람과 혹은 자기가 생각하기에 좋은 사람과 일을 하고 싶어 한다.
실력은 매일 같이 채워나가면 된다.
어느 순간 고객이 원하는 실력의 임계치에 도달하면 그때부터 고객의 선택은 태도이다.
그 분야에 최고가 아니었음에도 인정받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백종원은 최고의 요리사가 아니다. 유재석 또한 최고의 개그맨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 정상의 위치로 인정받고 신뢰받는다.
영어는 참 정직하게도 매일 하지 않으면 매일 조금씩 그 실력을 잃어간다.
하지만 똑같이 잃어가는 중요한 가치도 존재한다.
어느 순간 매일 바쁜 스케줄을 소화하다 보면 정말 중요한 가치를 잊어간다.
조금씩 계단을 오르면 자꾸만 잊게 된다.
나는 누군가에게 좋은 통역사인가?
나는 그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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