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 된다는 건 감정을 묻고 살아야 한다는 것
첫째 아이는 공동육아 어린이집에 보냈었다.
선생님이 휴가를 가는 날이면 엄마들이 일일 교사를 담당했었다.
어느 날 5살 반의 일일 교사를 하는 날이었다.
5살 한 아이의 옷에 붙은 밥풀을 보고 친구가 떼어먹었다.
사실 그 밥풀이 붙은 아이는 자기 옷에 밥풀이 붙은지도 몰랐다.
하지만 친구가 떼어먹는 것을 보고 화가 났다.
아이는 “내 거야”라고 서럽게 울었다.
얼른 부엌에서 밥풀을 가져와 다시 그 아이의 옷에 붙여 주며 다툼은 마무리되었다.
아이들은 먹는 것에 민감하다. 돈도 필요 없고, 쿠폰이나 상품권도 필요 없다. 그냥 내 몸에 붙은 줄도 몰랐던 그 밥풀은 내가 먹을 수 있었던 것이고 내 것이다. 그래서 화가 났다. 그리고는 화를 낸다. 아이들은 1차원적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다.
나는 세 살 터울의 두 아이의 엄마이다.
아이들은 매일 같이 투닥투닥 싸운다. 여자아이들이라 맨날 말로 따지고 다툰다. 그래서 시끄럽다.
그들의 다툼이 일상임에도 불구하고 유난히 화가 많이 나고 참기 힘들 때가 있다.
아이들이 사이좋게 지내지 않고 싸우는 건 이상적이지 않은 상황이다.
쉽게 생각해보면 아이들이 원인이다. 그들이 싸우면 싸우는 걸 보고 있어야 하는 내가 기분이 나빠진다. 그러면 나는 화가 난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화를 낸다. 원인은 아이들의 다툼으로 결론지어진다.
책에서 보면 이상적인 부모는 화를 내지 않는단다.
그런 엄마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들을 이해시키고 타이른다.
나도 가끔은 그랬다. 가끔은 타이르고 질문하고 아이들의 말을 들을 줄 아는 엄마일 때도 있다.
가끔 그렇게 이상적인 엄마가 될 때와 아닌 때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 스스로에게 그 차이점은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두 가지 원인이 있었다.
주로 내가 화가 쉽게 나는 순간은 아주 피곤하거나 배가 고팠다.
피곤하면 만사가 귀찮아진다. 당연히 아이들의 싸우는 소리는 더욱더 짜증이 난다.
그리고 난 배가 고프면 쉽게 화를 낸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건 나뿐 만이 아니었다. 아이들도 자꾸 다투면 배가 고픈 상태일 확률이 높았다.
싸울 때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보다 먹을 걸 챙겨주는 것이 내게는 훨씬 쉬운 일이었다.
두 딸의 말싸움이 절정에 달하면 얼른 뭔가를 해서 먹였다.
이상하게 먹고 나면 극에 달했던 그들의 말싸움은 차츰 누그러지고 감정들은 뭔가 정리되어 갔다. 물론 잠시의 휴전이 그들을 진정시키기도 하겠지만 분명 배가 고프다는 건 인간의 참을성을 떨어뜨린다.
그 이후 작은 것에 화가 나고 남편이 미우면 내가 배가 고픈 건 아닌가 의심해 본다.
내가 화가 난 원인은 아이들의 싸움이라고 쉽게 결론 낼 수 있지만 원인은 사실 그것만은 아니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원인을 쉽게 알아차리지 못한다.
어른이 되면 우리는 감정을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것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그 감정들이 1차원적인 감정일 경우에 우리는 그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 부끄럽다.
우리 사회는 감정과 욕구를 드러내는 것을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여긴다.
갑자기 화가 난다고 내가 화가 났다는 표현을 하거나 누군가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고 자기네들끼리 먹는다고 왜 나만 빼놓고 먹냐고 대놓고 묻는 건 큰 용기가 필요하다.
섭섭하지만 섭섭하지 않은 척, 안 먹어도 괜찮은 척, 쿨 한 척해야 내 체면이 구겨지지 않는다.
어린이집의 밥풀 사건처럼 아이들은 어릴수록 감정과 느낌에 솔직하다.
하지만 어른이 된 지금도 배고픈 내가 더 쉽게 화를 내듯이 많은 감정과 갈등은 아이나 어른이 된 지금이나 1차원적인 원인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커피를 사 왔는데 내 꺼만 안 사 왔다고 하자. 정말 섭섭하다.
미국인 브라이언은 내가 그렇게나 잘해줬는데 나에게 빵 하나 나눠 먹지 않고 혼자 두 개를 다 먹었던 기억은 마음속 깊이 남는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상대를 평가한다. 사람들 챙길 줄 모르는 동료,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는 인간이라고 한다.
상대를 평가하고 내 감정을 살피지 않는다.
스스로의 감정을 지속적으로 감추어야 하는 사회에 사는 우리는 어는 순간 감정 문맹으로 변해 가는 듯하다.
지금 당장 생각해보자.
우리는 과연 현재의 내 감정을 몇 개의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가?
당장의 기분을 정서나 감정을 단어로 5개 이상 표현할 수 있는가?
감정을 표현하는 수많은 형용사, 동사가 있지만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바로 알아차리고 표현하기 힘들다.
나는 심리 상담을 한 뒤에 내 감정 뒤에는 “수고했어, 힘들었지?”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어른스러움에 가려 내 깊은 마음속 감정을 덮고 살아간다.
그래서 한국의 유튜브나 방송에는 유난히 자막이 많다.
시청자가 느낄 마음의 감정을 잘 읽어 내어 자막으로 정리해 준다. 어떻게도 그렇게 내가 느끼는 감정을 자막으로 잘 표현하는지 신기하고 재미있다.
또 다른 프로그램은 ‘나 혼자 산다’처럼 그 장면을 보면서 다른 출연자들이 관찰해서 해석해 준다.
그 관찰자들은 감정과 행동을 하나하나 재미나게 읽어주고 해석해 준다. 내가 애써서 해석할 필요 없이 편안히 보면 된다.
어디에서 웃어야 하는지 어디에서 왜 그랬는지 나 대신에 따박따박 물어준다.
우리는 감정과 느낌을 대놓고 이야기하지 않는 문화이다. 상황과 맥락을 읽어야 하는 고맥락 문화이다.
부모님에게 용돈 봉투를 내밀었는데 부모님이 “돈도 없는데 뭔 용돈이냐 됐다!” 한다고 바로 그 봉투를 거둬들일 수 없다.
상대의 감정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집중하고 상대를 살펴야 한다. 상대가 하는 말만 잘 듣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도 보고 앞뒤 상황도 파악해야 한다.
배경 상황도 미리 알아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타인의 감정을 읽기 위해 애써야 하는 사회이다.
비슷한 문화인 일본의 방송도 한국처럼 자막이 많으며 관찰 프로그램이 많다.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닌 미국인 고객, 대니에게 들은 이야기이다.
한국 예능 프로그램의 자막 읽기가 너무 재미있어서 미국에서 친구들과 함께 영어로 자막 해석된 한국 예능 방송을 함께 보았다고 한다. 하지만 미국인 친구들은 그다지 재미있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대니는 자막으로 모든 감정을 읽어 주는 한국의 방송을 상당히 즐겼다.
뿐만 아니라 대니는 한국을 방문하며 이모티콘 캐릭터 용품을 사고 싶어 했다.
미국에서 사용하는 메신저는 이렇게 다양한 이모티콘이 없다.
한국만큼 이모티콘 하나로 많은 감정을 표현하는 캐릭터를 미국이나 유럽의 메신저에는 찾아볼 수 없다.
Whatsapp을 보면 간단한 감정을 표현하는 이모티콘뿐이다.
하지만 한국의 이모티콘은 여러 가지 감정과 의미를 함께 내포한다.

내가 스스로 읽기 힘든 내 복잡한 감정을 단 하나의 이모티콘으로 표현해준다.
자랑을 하지만 웃기고 그러면서 겸손해 보이는 이모티콘, 이런 감정을 내가 메시지로 표현하기는 너무 어렵다.
이런 이모티콘들은 나를 보여 주고 인정받고 싶지만 그럼에도 겸손해야 하는 우리의 문화를 보여준다.

한 개의 이모티콘은 여러 감정을 복합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국의 이모티콘, 관찰 예능, 재미난 자막 모두 우리가 누군가의 감정을 살펴야 하는 고맥락 문화의 피곤함을 덜어준다.
밥풀 하나로 싸우던 아이들도 자라면서 서서히 스스로의 감정 읽는 법을 잊어 갈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우리처럼 이모티콘 뒤에서 감정을 숨기는 어른스러움을 갖추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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