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생의 지혜를 믿어야 가르치지 않고 기다릴 수 있다.
매 학기 대전 UST (한국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 석박사 과정 학생들을 대상으로 디자인 싱킹 워크숍을 비대면으로 진행한다.
매번 나에게 있어 가장 큰 도전과제는 교육 과정에서 학생들의 실수를 지켜보는 것이다.
디자인 싱킹 강의에서 누구나 쉽게 저지를 수 있는 실수가 있다.
문제정의가 잘못되기도 하고 문제정의 속에 두 개의 문제를 같이 정의하기도 한다.
그 무엇보다 가장 흔한 실수는 바로 설루션/해결방안을 맘속에 두고 모든 프로세스를 내가 생각한 솔루션에 끼워 맞춰 가는 것이다.
내 고객 대상도, 내가 바라는 고객이 처한 어려움도 내가 바라고 생각한 제품이나 서비스에 맞게 시나리오를 작성하듯 맞춰간다.
결국 현존하지 않는 소비자(유저)를 내가 가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외국인들과 디자인 싱킹 과정을 진행해보면 이러한 현상은 한국인이에게 더 현저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우리는 누구나 빠른 해답을 찾고 싶어 한다. 문제만 봐도 막 어떻게 해결하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해결의 속도가 누구보다 빨라야 했던 한국적 사고는 디자인 싱킹 과정에서 공감이라는 첫 단계의 몰입을 더욱 힘들게 한다.
나 또한 아이가 고민을 이야기하면 그 고민을 듣는 동안에도 이미 머릿속에는 어떤 해결책이 있을까 생각하기 바쁘다. 아이의 이야기를 집중해서 듣지 못하고, 아이의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그 조언들을 쏟아내곤 한다.
충분히 많은 옵션과 방법을 알려주어 아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아이는 끝내 울음을 터트리고 엄마가 자기 마음을 알아주지 않음을 서운해했다.
공감하지 못하고 해결 방안들만 늘어놓은 엄마는 아이가 문제를 해결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런 나와 다름없이 디자인 싱킹 과정을 진행하면 누구나 사용자에 진짜 공감을 하기 전에 문제의 해결책이 머릿속에 가득 떠오른다.
이런 순간 언제나 나의 역할은 교육생들에게 최대한 공감에 머무를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특정 솔루션을 마음에 둔 학생들은 그에 맞춰 페르소나(사용자)를 끼워 맞추기도 한다.
그럴 때면 피드백을 바로 해주고 싶은 욕구가 올라오지만 난 그 욕구를 눌러야 한다.
내가 UST에서 만난 모든 학생들은 몇 번의 질문을 던져 주는 것 만으로 자신들이 실행 과정에서 공감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문제 해결책으로 넘어가 버린 것을 알아차린다.
스스로 실행의 문제를 알아차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다음이 더욱 중요하다.
다음은 그 프로세스를 다시 작업하는 수고를 감당할 것인가이다.
실수를 인정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다시 진행하는 것이다.
실수를 하고 그것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인정하고 그리고 다시 반복하는 이중 task의 과정을 오롯이 겪어야 한다.
UST 학생들은 모두 정부기관 연구소에 있는 연구원이다. 내가 만난 그들은 이러한 실수를 알아차리면 결국에는 인정과 수정을 실행한다. 한국의 브레인들이 연구하는 연구소 인력들이 이런 개선의 과정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참 자랑스러운 일이다.
한 번은 마지막까지 맘속 솔루션에 맞춰가던 그룹이 있었다. 스스로 실수를 알아차리는 듯했으나 전체 과정을 다시금 진행하는 노고를 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매번 질문을 던지는 나를 불편해했다. 내가 가까이 가면 토의를 멈추기도 하고, 결과물을 감추기도 했다. 하지만 최종 발표날 모든 걸 다시 제대로 만들어와 전체 발표에서 결국 1등 했다.
가장 무뚝뚝했던 그 그룹의 한 학생은 마지막 날 교실을 나가며 나에게 와서 한마디를 남겼다.
"이제까지 들은 수업 중, 최고의 수업이었습니다."
실수, 실수의 인정, 개선과 수정의 여정을 오롯이 겪어보는 과정은 학습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보석 같은 기회다. 더 힘들었을 그 과정을 오롯이 겪은 팀은 디자인 싱킹 과정을 제대로 학습하고 절대 잊을 수 없는 학습의 경험을 스스로 만들어 냈다.
그건 강사로 내가 만들어 준 최고의 수업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최고의 수업이었다.
가이드와 같은 역할에서 내가 인도하고자 하는 누군가의 실수하는 과정을 바라보고 있다는 건 참 힘든 일이다.
그들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보이지 않고 그 과정을 극복하지 않은 채 문제로 남아 버리면 결국 그 화살은 나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강사, 교육자, 부모들은 정답을 자꾸만 알려주고 싶어 진다.
이런 순간 내가 지켜가야 하는 것은 바로 '그들이 해낼 수 있다는 완전한 믿음'이다.
내가 관여하고, 힌트를 주고, 좀 더 끌어 준다는 것은 좀 더 쉽게 실수 없이 진행될 수 있으며 문제가 문제로 남는 현실은 막을 수 있다. 하지만 교육생이 가지는 성찰과 성장은 크지 않다.
청소년 온라인 국제 문화 교류 프로그램의 퍼실리테이터로 참여하여 한국 청소년들과 외국인 청소년 간의 토론을 이끌었다.
외국인에 비해 한국인들은 대화에 적극성이 떨어진다. 질문을 하는 친구들도 외국인 친구들이 훨씬 많다.
한국인 청소년들은 자발적으로 의견을 말하는 친구들도 드물다.
전체 프로그램 중 Peer talk 세션이 있다. 이 시간에는 퍼실리테이터의 지원 없이 오롯이 2~3명씩 랜덤으로 지정된 외국인과 한국인과의 그룹에서 서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퍼실리테이터는 이때 화면과 마이크를 끄고 각 peer talk 그룹을 돌아다니며 대화가 잘 이루어지는지를 모니터링한다.
이때 또다시 나는 엄청난 유혹에 시달린다.
바로 외국학생이 하는 말을 한국 학생이 잘 못 알아들을 경우 무슨 말인지 알려주고 싶은 욕구,
특히나 나는 통역으로 오랫동안 일을 해서 이런 경우 정말 본능처럼 소통을 돕고 싶은 욕구가 솟구친다.
그 욕구를 참지 못하고 채팅에 해석을 적어가고 있을 무렵, 외국인 학생은 본인이 한 말을 채팅창에 남겼다.
채팅창의 글을 보고 이해한 한국인 학생은 자신의 의견을 더듬거리나마 대답하고, 이후 서로 이해할 수 없을 경우 채팅창을 활용하여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렇다. 대화의 수단이 꼭 말일 필요는 없다. 말로 표현할 수 있다면 말로 표현하고, 이해할 수 없다면 채팅창에 쓰면 되고, 쓴 말이 이해되지 않으면 구글 번역기를 돌리면 된다.
현지 음식과 현지 문화를 이야기하다 잘 모른다면 구글에 검색창에 입력하면 되고, 검색 결과로 충분히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다.
지금의 청소년들은 내가 알고 있는 방법보다 더 많은 소통의 방법을 알고 있다. 나의 도움 없이 소통의 방법을 스스로 적극적으로 찾아가고 결국 찾아낸다.
강사로, 선생님으로, 퍼실리테이터로 그리고 부모로서 그들의 능력과 지혜를 믿고 있는가?
나는 그들의 지혜를 인식하고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가?
그들이 그 지혜를 발휘할 수 있도록 나는 나를 내려놓고 인내하는가?
내가 아는 작은 지식과 경험들이 그들의 생각을 막지 않도록 그들에게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지 오늘도 고민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