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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Fly Jan 23. 2019

19. 차라리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그려가리.... 고 유재하 님의 "내 마음속에 비친 내 모습"의 끝 구절이다.

 

남자와 여자를 막론하고 사람이 가장 예쁠 때는 20대일 것이다. 외모를 말하는 것이 아닌, 인생에서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반짝반짝거릴 수 있는 나이. 이때에는 거울을 봐도 나만 보인다. 그렇다고 연예인처럼 막 예쁘다는 게 아니라 그래도 봐줄만하다는 의미이다.


30대에도 그 느낌은 연결된다. 무엇을 하던간에 경험이 쌓이는 만큼 자존감과 자신감도 차곡차곡 쌓여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더 또렷해진다. 이제는 옷차림도 특히 신경을 쓰게 되고, 같은 거울에서 다른 사람의 모습도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어쩔 수 없는 경쟁 시대이니만큼 거울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쟤가 더 예쁜데? 내가 좀 딸리는데 어떡하지....


수많은 비교를 견뎌내고 내면의 견고함을 다진 상태에서 40대에 접어들어도 절대 어쩔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과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의 격차가 커지는 현상이 바로 그것이다. 처음 이 현상을 느낀 때는 30대 후반이었다. 셀카를 늦게 배워서 한동안 엄청 찍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카메라에 비친 내 모습에 홀려 찰칵찰칵 참 많이도 눌러댔다. 그러나 저장된 사진을 봤을 때의 충격이란! 정말 허걱이었다.


카메라를 쳐다봤을 땐 분명히 내가 기억하는 30대의 내가 있었던 반면, 픽셀로 보이는 나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구려 보인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제껏 이런 얼굴로 돌아다녔나 싶을 만큼 자신감이 바닥으로 추락하는 느낌이랄까.


그 후로 한동안 셀카를 찍지 않았다. 대신에 최대한 못난 얼굴을 가려보려고 화장기술을 익혔던 것 같다. 셀카를 좋아하지 않았던 한 친구는 어느 날 자신의 얼굴을 들여봤다가 엄청나게 놀랐다고 했다. 여기저기 보이는 선스팟과 주근깨도 미쳐버리겠는데, 우주 절대 권력인 중력이 날렵했던 턱선과 통통했던 볼살을 더 아래로 끌어내려버렸다. 우울해졌다는 친구에게 나는 그동안 행복했겠다고 하면서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있다.


몇 해가 훨씬 지난 후에 다시 셀카를 찍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최선을 다한 모습이 나올까 싶어서였다. 그러다가 영접한 스노우 어플. 어머 머머, 신박한 아이템! 카메라를 볼 때도 예쁘고, 찍힌 사진도 너무너무 예쁘게 나오는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도 이 어플에 미쳐서 엄청나게 찍어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자 타임은 온다. 이 가상현실에 미쳐있다가 외출을 했다가 유리창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거나, 백화점이나 쇼핑몰을 걸어 다닐 때 문득문득 거울을 통해 보이는 내 모습을 볼 때면.


최대한 꾸미고 나간 내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안경을 걸친 낯선 여인과 마주하게 되면 흠칫흠칫 놀란다. 이래서 안경을 안 끼려고 했는데 어째 더 늙어 보이는 것만 같다. 어제 친구와 만났을 때도 같은 현상을 경험했다. 그녀가 찍은 사진 속의 내 뒷모습은  이래도 될까 싶을 정도로 덩치가 커 보였으며 등은 굽어있었다. 예쁘다고 생각했던 최근에 한 펌도 매우 촌스러워 보인다. 햇볕이 드는 창가에서 찍은 휴대폰에 빌트인 된 카메라로 찍은 셀카는... 다시 어플로 바꿔 찍었다. 쪼금 낫다.


이쯤 해서 인정해야 한다. 좋든 싫든 나는 이제 '아줌마'가 된 것이다. 어린아이들이 가끔 길에서 '아줌마'라고 부를 때도, 물건을 사러 갔을 때 점원이 '사모님'이라고 부를 때도 귀찮아서 가만히 있었던 거였지 나 스스로 '아줌마'라는 생각은 못했던 거 같다. 아줌마라는 뜻이 결혼한 여성으로만 한정 짓지 않으면 나는 아줌마다. 우울하다. 친구와 헤어지고 백화점을 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가지 말았어야 했다. 온갖 예쁜 옷들만 걸려있는 브랜드마다 걸려있는 전신 거울에 스쳐가는 내 모습에 멈칫하고 '누구세요?' 할 정도였다. 밝은 조명에 비친 나의 전신. 내가 봐도 낯설다.  우울에 우울을 더 합치니 열패감이 작렬이다. 제일 좋아하는 영어단어 중의 하나인 엎친 데 덮친 격의 뜻을 지닌 double whammy가 딱 맞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연습한 습관인 부정적인 현상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려는 나의 의지로 가만히 앉아 생각해 보았다. 현실은 현실이다. 이게 나다. 나이가 들었으니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쩔 수 없다. 20여 년 넘게 컨택트렌즈로 혹사당한 내 눈은 안경을 쓸 수밖에 없다. 바꿀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예쁜 옷을 입어도 다 소용없다. 바꿀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


생각해보면 언제 제일 예뻤던가? 반박의 여지없이 웃을 때이다. 어플로 찍든, 빌트인 카메라로 찍든, 웃는 얼굴이 그나마 낫다. 살을 빼고 운동을 해도 한계는 있다. 그렇다면 웃는 거 이외에 남은 건 한 가지이다. 자신감을 되찾는 것. 사진에 보이는 나의 적나라한 얼굴을 보고 한숨을 짓느니, 내 머리를 채우고 글을 쓰는 게 자신감을 되찾는 데 훨씬 도움이 된다.


지난해 12월, 초등학교 동창들과 모임이 있었다. 그녀들은 스노우 어플을 모르고 있었다. 어플 하나 깔고 사진을 찍어대며 까르륵 대는 모습에 나까지 행복해진다. 그래, 잠시 가상현실에 빠져있는 게 뭐 어때서? 도박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알함브라의 궁전'에서처럼 증강현실에서 적들과 칼질하느라 남에게 피해 주는 것도 아닌데.


'이제 와 뒤늦게 무엇을 더 보태려 하나. 귀 기울여 듣질 않고 달리 보면 그만인 것을. 못 그린 내 빈 곳 무엇으로 채워지려나. 차라리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내 모습 그려가리.'


역시 유행가는 유행가다.


도리스 레싱의 '19호실로'를 마저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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