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ne Mar 12. 2022

그림책 읽기에 관한 짧은 탁상공론    

어린아이들과 영어 그림책을 읽거나 또 앞으로 읽어  보겠다는 교사(지망생)학생들을  대상으로 그림책 수업을 하다 보면 몇 가지 난관에 부딪힌다. 그중 가장 난감한 것은 영어 그림책이 영어 학습서가 되어버리는 상황이다. 그림책을 연구해서 아이들과 할 간략한 수업 계획을 만들어 오는 과제가 나가면 이 교사(지망생)학생들이 영어 구문 연습문제를 만들어 가지고 오는 것이 바로 그 상황이다.


그림책의 글 본문을 샅샅이 뒤져 가르칠만한 영어 문법 꼭지를 잡아내고 아이들이 입에 올려 할 수 있는 단계까지 구문 연습을 깔끔하게 만들어 온다. 만약 그림책 본문 글에 영어 비교급 표현이 몇 번 올라왔다면 '아이고 감사. 숙제 끝!' 하고 일사천리로 비교급 설명과 연습문제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비교급 연습은 비교적 만들기 쉽기 때문에.


그렇게 해온 과제를 발표하면 그냥 '흐-윽'하고 잠깐 삼킨다. 그렇지만 결국에는 '그래. 영어(문법) 공부를 시키지 말라는 게 아니라... 그것 하려고 이걸 읽는다는 게...' 하고 잔소리를 하고야 만다.  


'그림책 읽고 자기 생각 이야기하고, 뭐 주제 이런 거... 어디로 튈지 모르는 10살짜리 스무남은 명 데리고 그건 아예 불가능이지. 교수들은 그저 탁상공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야.'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10살짜리, ' '스무남은 명, ' 맞는 말씀. 어떻게,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주제라고 하니 그래도 변명을 해본다면

주제 없이는 (영어)그림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림책은, 이 세상의 모든 텍스트가 그렇듯이 그 글 뒤에 숨어있는 작가의 정신 작용 때문에 의미가 있다. 바로 그 정신 작용의 핵심이 주제임을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지 않은가? 그 정신 작용이 벼려진 언어에 실려서 세상에 나오면 우리는 그 글 덩어리를 소중히 여긴다. 어린이들도 그 글 덩어리가 펼쳐 주는 정신세계의 들판에 뛰어들어 세상과 인간을 접하고 스스로를 알아내는 경험을 즐긴다. 그리고 그 벼려진 언어는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그 말을 가지고 노는 어린 독자들의 새로운 정신 작용의 도구가 된다.


탁상공론. 맞다.  


이 무궁한 가능성의 글 재료를 작은 면도칼로 조각조각 잘라내서 말 연습 예문 수준으로 강등시킨 후 말공부만 시키는 일을 좀 멈추면 어떨까 하고 감히 "론(論)"한다.


따듯하고, 즐거운 <버클 경관과 글로리아>(Officer Buckle and Gloria)*를 가지고 만든 수업안을 들여다보자.


학생: 여기서 never+동사와 don't +동사 형태의 부정명령문 연습을 시킵니다.

교수: 그러니까  하지 말라는 말을 만들 건데?

학생: 그냥 일상적인 일, 애들이 아는 동사 위주로...

교수: 그럼 그거 다 빈말하는 거지. 애들이랑 무슨 상관이 있나요?

학생:...(영어 구문 연습인데 빈말이 뭔 얘기야. 그게 뭔 상관... x@$%...)


재빠른 학생들은 이런 개연성 없는 문법 연습이 안 통한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학생: 책을 다 읽고 나면 모둠으로 앉아서 교실에서 지켜야 될 규칙, 하면 안 되는 행동 규칙을 만듭니다. 본문에서 never나 don't를 가지고 와 만들도록 지도합니다.

교수: 음. 애들이 자기들 생각을 모아볼 수 있게 하는 점이 좋네요. 그런데... 이 그림책이 규칙 지키는 것에 관한 이야기 든가요?

학생:...(글 속에 뭐 하라, 말아라 하고 전부 규칙이구만... 그럼 아니면 뭐라고...)

교수: 이 이야기의 주제가 뭔 것  같아요?


"주제" 소리가 떨어진 순간부터 학생들은 입을 다물고 아래를 본다.


교수: 규칙 잘 지키자는 그런 이야기인가?  뭐, 끝--에 가서는, 궁, 극, 적으로는 그거지... ,  

학생:...(뭐래. 혼자서. 맞댔다가 아니랬다가... 아, 그냥 좀 넘어가면 안 되나...X!@$%!)  


주제를 찾아야 해

너 나 할 것 없이 무언가를 읽고 그 주제를 확실하게 잡아내는 것은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일까? 글을 매개로 하는 정신작용의 핵심이기에 주제는 당연히 알기 어려운 것인가? 그림책을 주제와 상관없이 표면적인 내용만으로 생각하고 접근하는 일이, 그래서인지, 흔히 일어난다.


까까머리 6살짜리 주인공이 끝없이 말썽을 일으키며 집을 뒤집어 놓는 내용의 그림책, <No, David!>의 저자 데이비드 섀넌(David Shannon)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사람들이 저에게, 말썽 부리는 애들은 어떻게 훈육하면 좋으냐고 물어봐요." <No, David!>가 유명세를 타면서 '저자와의 대화' 같은 모임에 많이 불려 다닌 모양이다. 참석한 학부모, 교사들이 저자에게 하는 질문인가 본데 다른 할 말이 없어서 그렇게 물을 수도 있지만 저자로서는 난감하다.


세상 사람 좋게 생긴 데이비드 섀넌은 웃으며, "제가, 훈육을 어떻게 하라, 그런 건 모르죠"한다. 어색한 표정이 살짝 지나간다. "사실 제가 말썽꾸러기였어요. 나쁜 뜻으로 그렇게 말썽을 피우는 건 아닌데..." 자기 작품의 주제를 언급하며 정면 돌파한다. <No, David!>는 데이비드의 관점을 보여주는 것이지 데이비드 같은 애의 훈육용은 아니다. 섀넌은, '그 말썽꾼을 귀엽게 생각하고 즐기면 좋을 것 같다'라고 충고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너무 심하면 복도로 쫓아내서 좀 서 있게 하세요. 그러면 말 들어요, 저도 그랬거든요."


부모님들은 짚어도 너무 잘못짚었다. 데이비드 이야기는 말썽 피우는 애를 축복하는 이야기인데 부모님들은 그림책이든 뭐든 책은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고만 생각하니 이야기의 주제를 오해하기에 딱 좋은 포지션을 아예 장착하고 있는 행상이다.


그렇게, 그림책이 무엇을 가르치려고 한다고 생각하고 아이들을 데리고 그 주제를 추구하면 그림책 읽기에서 재미가 사라질 것이다. 아이들이 작가가 구현한 정신의 들판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헤매는 일이 없을 것이 그 이유다. 그러나 부모가 원하는 배움은 그것이 말이든 버릇이든 아주 한참 후에나 결과적으로 따르는 것이다. 그 배움을 기대하면 아이들을 들판에 풀어놓는 것 외에는 다른 수가 없다. 시간을 많이 주어야 한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급하게 배운다는 것은 벌써 언어 모순이고 인간 세상에서  잘 일어나지 않는 일 같다.


스무남은 명의 어디로 튈지도 모르는 10살짜리들을 데리고


주제를 찾기 위해서는 작은 질문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버클 경관은 왜 글로리아를 무대 위로 데리고 가서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했나? 주제와 직결되는 질문이고 내용을 잘 따라가며 읽었다면 나올 수밖에 없는 질문이다. 아이들이 먼저 묻지 않으면 교사가 물어주면 된다. 대답과 질문이 계속되도록 조금 끌고 갈 필요가 있겠다. 크게 봤을 때 좋은 대답이 있을 수 있지만 답을 정해 놓고 하는 문답은 아니어야 할 것이다. 아이들의 생각이 나름대로 논리적으로 펼쳐지도록, 생각을 따지는 이치 싸움이면 충분할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아이들과 한참 하고 난 후에는 영어공부 좀 한다는 의미에서 버클 경관이 글로리아에게 내린 명령, 'sit'에 연결하여 명령문을 연습하면 될 것 같다. 아이들이 서로에게 명령문 폭격을 할 수 있도록 시간적 여유를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아이들이 혹시 교사 자신을 향하여 'Sit down!' 혹은 'Get out!'이라고 명령문을 발령하면 어떻게 대응할지도 생각해 놓을 필요가 있겠다. 어쩌면, 더 살벌한 명령문이 나오기 전에 '공부 끝'이라고 외치고 다음 시간에 헤맬 들판 이야기로 주의를 돌리는 것이 훨씬 나은 방법인지도 모른다.   



* <버클 경관과 글로리아>의 줄거리 소개는 '그림책을 읽어본다 1'에 제시한 것으로 갈음한다.

** Reading Rockets와의 인터뷰. Readingrockets.org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본 글의 내용과 사진 이미지는 저작자의 허락 없이는 어떤 형태로도 사용할 수 없습니다.

Copyright 2022. Jane  All rights reserved.







작가의 이전글 그림책을 읽어본다 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