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니 케이크> (Bunny Cakes)
로즈메리 웰즈(Rosemary Wells)는 미국의 유명한 그림책 작가 및 삽화가로 1971년에 첫 그림책을 출판한 이후 79세인 현재까지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다. 긴 작가 경력에 비해 그림책 평단에서 인정받는 상을 수상한 경력은 다소 부족해 보이지만 웰즈는 실제 매우 잘 팔리는 그림책 작가라고 볼 수 있다.
그의 그림책은 우선 사랑스럽다. 채도를 낮춘 다양한 보색의 색들이 만들어 내는 명랑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에 주인공은 모두 포동포동한 동물 캐릭터다. 유치원 연령을 주 대상으로 아이들의 일상을 즐겁게 그려내는 것이 그의 그림책의 세계다.
<Bunny Cakes> Rosemary Wells 1997 Puffin Books
2010년 미국의 국회 도서관(The Library of Congress)이 주최한 전국 도서 페스티벌(National Book Festival)의 초청 강연에서 67세의 노장 웰즈는 아이들은 책을 읽으며 일상에서의 해방을 느끼고 그 속에서 배우고 즐기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 아이들이 혼자 책 속에 빠질 수 있는 프라이버시를 보장해 줄 것을 어른들에게 주문한다. 교사들을 향하여는 아이들에게 읽을 책을 주고 급하게 질문을 쏟아내지 말라는 말을 덧붙인다. 동시에 자신의 그림책이 "아이들의 적절한 일상 탈출을 위한 안전한 가교 노릇을 한다”라고 말한다. 또, 좋은 책은 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어른들의 마음까지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도 잊지 않는다.*
노장은 일상 탈출을 장담하지만
웰즈는 자신의 모든 캐릭터를 동물로 표현한다.** 웰즈의 그림책 시리즈 중 가장 많은 스토리가 출판된 맥스와 루비(Max and Ruby) 시리즈도 핑크빛 귀와 코를 가진 토끼 모습의 캐릭터가 주인공이다. 이 토끼 남매, 맥스와 루비의 일상에서의 좌충우돌이 이 시리즈의 주 내용이다.
맥스와 루비의 이야기 중 하나인 <버니 케이크>는 남매가 할머니 생신을 맞아 축하 케이크를 만들면서 벌어지는 조그만 소동을 다루고 있다. 누나, 루비는 부엌에서 제대로 된 케이크를 만들고 동생, 맥스는 뒷마당에서 진흙 케이크를 만든다. 누나가 케이크를 만드는 부엌이 궁금한 맥스가 부엌을 들랑거리며 케이크 재료를 엎고 사고를 치지만, 종국에는 할머니는 생일 케이크 두 개, 딸기 크림을 얹은 것과 진흙으로 만들고 빨강 마시멜로를 얹은 것을 받고 행복해한다는 이야기다.
글자, EGGS(계란)는 계란을 전혀 닮지 않음
이 남매의 생일 케이크 만들기 소동의 실제 내용은 ‘맥스의 성공적인 쇼핑 리스트 작성기'이다.
엄마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 구조에서 누나 루비는 부엌에서 능숙하게 온갖 도구와 케이크 재료를 꺼내 놓고 케이크를 만든다. 키가 닿지 않아 의자를 놓고 그 위에 서있는 지경이지만 자신만만하다. 그런데 문제는 동서남북 분간 없는 동생 맥스다. 누나가 벌려 놓은 일이 궁금해서 부엌에 들랑거리며 재료를 엎고 쏟는다. 그런 후에는 부족한 재료를 사 오기 위해 누나가 주는 쪽지를 들고 가게로 내달린다.
이렇게 케이크 재료를 엎지를 때마다 각 각 계란, 우유, 밀가루라고 쓴 쪽지를 들고 심부름을 다니면서 맥스도 사실은 사고 싶은 것이 있었다. 할머니를 위해 만드는 진흙 케이크에 얹을 빨간 마시멜로다. 맥스는 아직 글자를 배우지 않았지만 누나가 "EGGS"(계란)라고 써서 준 쪽지 아래에 자기가 살 물건을 쓴다. 크레용으로 휘갈긴 정체 모를 낙서 같은 것. 어차피 누나가 쪽지에 쓴 글자도 분명히 계란을 의미하는 것인데 계란하고 하나도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으니 자기도 적당하게 맘대로 썼다.
맥스가 아는 바로는 종이에 자기가 필요한 것 이름을 “잘” 끄적여 가게에 가지고 가면 바로 그것을 살 수 있다.
그렇게 우유, 밀가루를 차례로 사 나르는 동안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예쁘게 또는 공들여서 '붉은 마시멜로'라고 써 갔건만 식료품 가게 주인이 읽지를 못하고 누나가 써준 것만 내준다. 도대체 무슨 조화일까?
마지막에 맥스는 물건과 닮지 않은 글자를 쓰는 것은 포기하고 누나가 준 쪽지 아랫부분에 붉은 마시멜로우를 예쁘게 그려서 들고 간다. 성공이다. 가게 아저씨가 "이건 붉은 마시멜로잖아" 라면서 물건을 찾아 내준다. 맥스는 어떻게 그 방법을 생각했을까?
저자 웰즈가, "(내가 쓰는 이야기는) 논픽션이죠"라며 농담으로 한 말처럼*** <버니 케이크>는 남매간의 좌충우돌, 누나는 동생을 떼어버리려 하고 동생은 그래도 곁에 붙어서 무엇이든 따라 하려 하는 그런 형제간의 늘 일어나는 이야기다.
그러나 <버니 케이크>가 논픽션인 것이나 다름없다면 어디쯤에서 이런 광경이 벌어질까? 미국 중산층의 안락한 가정이 그 배경일까? 삽화에 이미지로 드러난 중산층 배경의 힌트를 찾아보자.
부드럽고 평온한 중산층 내러티브
누나 루비가 스탠드 믹서 등 갖은 베이킹 도구를 꺼내놓고 케이크를 만들고 있는 부엌 창 밖으로 나무와 들판과 하늘이 보인다. 맥스가 누나 심부름하느라 바삐 오간 길의 풍경도 마찬가지다. 전형적인 교외 주택 지역이다. 도심에 사는 아이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시설 좋고 자연의 풍광이 아름다운 중산층의 거주 지역이다.
또, 버터, 계란, 우유 등 넉넉히 내놓은 케이크 재료가 여유롭다. 그리고 맥스가 깨거나 쏟아버리자 말자 아무 문제없이 그대로 동네 가게로 달려가서 필요한 것을 사 오면 된다. 맥스가 엎어버린 밀가루의 상표마저 "프리미어"(Premier, 최고)다.
더구나, 단정하게 체크무늬 옷을 입은 두 토끼 같은 아이가 커튼이 쳐지고 테이블에는 테이블보가 씌워진 깨끗한 부엌에서 "소동"을 벌이고, 그리고는 아무 탈없이 부드럽게 모든 것이 해결된다. 맥스가 진흙을 가지고 케이크를 만드는 뒷마당에는 중산층 주택의 상징인 낮은 나무 피켓 담장이 두 아이 뒤로 단단하게 둘러 쳐져있다.
또, 파스텔조 보색의 명랑하고 부드럽게 눅여진 채색과, 각을 최소한으로 하고 부드럽게 처리한 사물 묘사도 안락하고 평온한 가정의 분위기를 그려 준다. 각 페이지마다 사각형 틀 속의 삽화 주변을 넉넉한 흰 여백으로 처리하고 아래쪽의 상당한 넓이의 여백에 한 두 줄의 텍스트를 넣은 페이지 설정도 깔끔한 중산층 이미지 구현에 한몫을 한다.
부드럽고 평온한 그리고 단단한 중산층 내러티브다.
이야기 흐름에서도 루비는 어린 누나지만 일을 저지르는 동생을 효율적으로 잘 컨트롤하고 그러면서 생신 케이크를 예쁘게 만들어 할머니를 기쁘게 해 드린다. 중산층 부모의 판타지다. 좋은 그림책은 부모의 감성에도 호소할 수 있어야 한다는 웰즈의 소신이 <버니 케이크>에 제대로 드러난 것처럼 보인다.
웰즈는 책으로 어린이들에게 일탈의 시간을 약속한다고 하지만
그러면 이 중산층 내러티브가 문제란 말인가? 그렇다. 많은 비 중산층 가정 아이들은 이 유복한 아이들의 이야기에 어떻게 반응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동화"를 읽으며 어린이에게 꼭 필요하다는 그 즐거운 일탈의 경험을 어떻게 모색할 수 있을까? 탈출구 모색의 문제는 중산층 자녀들에게 더 심각하게 작용할 것이다. 이 이야기의 부드러움과 넉넉함은 맥스와 루비로 대변되는 아이들에게 '생각 그만'을 제안한다. 일탈은 그들의 선택지가 아니라고 암시하며 이 단단한 내러티브의 위엄에 따르면 모든 것이 평안하다고 넌지시 알리고 있다.
그림책이나 동화책의 즐거움이 일상을 떠나 자신만의 먼 상상의 세계로 가보는 일탈이라고 한다면 5, 6세도 이야기의 세계에서 자기만의 일탈이 가능해야 한다. 그러나 <버니 케이크>가 웰즈가 자신한 그런 일탈에의 가교 역할을 하고 있는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 웰즈는 어린아이들과 부모의 마음을 동시에 움직이는 책이란 말을 자주 한다.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그림책의 경우 구매자는 어른일 것이므로 어린아이를 위한 동화에서 평온하고 동시에 질서가 있는 (가정) 배경을 구현하는 것이 중요한 집필 요소일 수 있다. 어른이 구매하지 않으면 어린이는 그 그림책에 전혀 접근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어린이 문학 작가들이 염두에 둘 수밖에 없는 사항일 것이다.
** 웰즈는 본인이 동물 캐릭터만을 사용하게 된 이유로 감정을 실은 얼굴 등을 표현할 때 사람보다 동물일 경우 훨씬 쉽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이야기 내용에서 등장인물들이 남을 괴롭히거나 나무에서 떨어지거나 하는 위험한 행동을 하게 설정한 경우 어린아이들을 그런 폭력적인 상황에 넣어 그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동물은 그런 "폭력적인" 상황에 놓아도 괜찮다는 의미로 들려 좀은 불편하지만 작가의 확실한 뜻은 알 수 없다 (2010, 미국 전국 도서 페스티벌 강연. 유튜브에서 서비스됨).
*** 2010, 미국 전국 도서 페스티벌 강연. 유튜브에서 서비스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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