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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 Feb 15. 2022

그림책, 그림, 그리고 시각 기호


그림책의 그림은 글과 함께 그림책의 완성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그림 1과 글자 1을 합한 2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림이 더해진 둘의 합이 일으키는 시너지는 단순한 산수 계산을 넘어선다. 이런 그림의 힘이 그림책을 읽는 어린이들의 이야기 세계 속에만 자리하는 것은 아니다. 글자가 아닌 그림, 이미지로 이루어진 시각 기호를 통한 상호 소통은 비디오 매체의 시대에 사는 우리 일상의 전면에 포진하여 있다.


그러나 대다수의 개인은 이런 시각 기호 소통에서 받는 쪽의 역할만 주로 하는 이유로 이의 영향에 대해 특별히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예를 들어, 뉴스를 장식하는 유명인의 재판 출두, 혹은 검찰 소환 장면들을 보면 거의 모두 검정, 회색, 흰색 등의 무채색의 단정한 정장 차림새를 하고 있다. 소환된 죄목이 무엇이든 ‘기분대로 살지 않고 규칙을 지키고 사는 단정한 사람’이라는 메시지를 던지기 위해서이다. 한국에서는 이런 경우 출두 당사자든 이를 관망하는 관객이든 최소한 이런 정도의 “시각 문법”에 적응되어 있어 특별히 의식하지 않고 그 정보를 소화하는 듯하다. 만약 누군가가 이 규칙을 깨고 특별하게 다른 차림새로 나타난다면 그때 그 복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보다 좀 더 복잡한 이미지 메이킹, 즉 시각 기호 장치 이용의 예를 들어보자.


2021년, 미국의 곡절 많은 ‘흑인 생명도 중요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 와중에 또 한건의 경찰관 총기 오남발로 인한 흑인 사망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 북부 미네소타 주의 한 도시에서 26년 경력의 베테랑 경관이 도망가려는 용의자를 사살하게 된 사건이다. 해당 경관이 실수로 테이저 총 대신 실제 총을 발사하였고 용의자는 현장에서 사망했다. 미국에서는 많은 경우 임무 수행 중 실수로 발생한 치사 사건에 경찰의 책임을 묻지 않으나 2021년의 광풍 속에서 우선 그 경관은 직에서 물러났고 그 후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되었다.


그간의 보도에 의하면 이 모든 것이 어처구니없는 실수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경찰 바디캠 자료가 있었다. 그러나 총기 오발 후에 보인 해당 경관의 대처에 문제가 있었다는 비난이 일었다. 또한 백인 경관에 의한 흑인 용의자의 사살 사건이라 간단하지가 않았다. 또 무엇보다 이 도시가 바로 전 한 백인 경관이 흑인 용의자를 그야말로 중인환시리에 목을 눌러 죽인 사건이 있었던 미네아폴리스에 바로 붙어있는 곳이라 이 사건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결과적으로 해당 사건은 법정에서 유 무죄를 다투게 되었고 전직 경관 킴벌리 포터(Kimberly Potter)는 재판에 출두하게 되었다. 본 사건을 임무 중의 단순한 실수라고 주장하는 피고 측 변호사들은 킴벌리 본인을 증인석에 내세웠다. 그리고 26년 경력의 베테랑 경관 킴은 40대 중반의 ‘아무것도 모르는’ 중년 여인으로 변신했다.


킴은 재판 당시 이미 경관직에서 물러났지만 사건 당일의 그녀의 모습을 보면 단호한 공권력의 힘이 넘친다. 검은색 경찰관 복장에 어깨와 가슴에 배지와 명찰을 달고 한쪽 어깨에는 무전기, 허리 벨트에는 권총과 테이저건, 그리고 수갑과 경찰봉을 장착한 엄중한 모습을 하고 있다. 피고 측은 매스컴에 떠 돈 이런 킴 포터의 모습이 그녀의 무죄 증명에 장애물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다. 증인석에 앉은 킴은 누구도 그녀를 전직 경찰관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변신한 모습을 하고 있다. 26년 베테랑의 노련한 모습, 그리고 법을 집행하는 딱딱한 처벌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우선 킴은 병아리색이라고 부르는 부드러운 노란색의 얇은 카디건을 입고 있다. 살집이 있는 체격이므로 얇은 카디건이 보여주는 어깨선은 팔뚝까지 둥그런 곡선의 연속이다. 각이 없다. 이 "각" 없음은 그 카디건 아래에 입은 블라우스에서도 드러난다. 약간의 주름 장식이 붙은 밴드가 목을 둘러싼 밴드 칼라 모양의 블라우스다. 각을 보여주는 칼라도 없고 당연히 앞면에 절개된 직선의 여밈도 없다. 카디건과 같은 노란색에 드문 드문 고동색 계열의 무늬가 찍힌 부드러운 느낌의 옷이다. 아래는 검은색의 특징 없는 바지 차림이다. 여러 색이 섞인 옅은 브라운의 단발머리는 감고 그냥 말린 양으로 어깨까지 흩어져있다. 이 머리 모양새와 아무 화장도 하지 않은 맨 얼굴은 동네에서 흔히 마주치는 중년 여성의 모습을 만들어낸다.


동네 슈퍼에서 흔히 마주치는 아줌마의 모습으로 증인석에 앉은 킴은 진술 도중 훌쩍이며 “잘못했어요!(I’m sorry!)라고 돼낸다. 훌쩍이는 모습이나 너무 크게 내지른 ‘I’m sorry!’는 감정이 범벅이 되어 있어 ”아이고, 참.”이라는 반응을 끌어내기에 족하다. 잘못했다는 말도 수 십 가지로 다르게 할 수 있을 것인데 킴이 선택한 것은 ‘나는 아무것도 따질 줄 모르고 그냥 무던하게 사는 시민인데 어쩌다 직업 때문에 이런 바보 같은 일을 저지르게 되어 미안하다’는 사과이다. 이렇게 잘못을 비는 이미지에 복장을 맞춰 시각 정보 메이킹을 했다.


전직 경찰관이 자신이 아무것도 모르는 '답답이'였다고 온 천지에 광고하는 것이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자신의 과실이 인정되면 십 수년의 감옥 생활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므로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킴이 입고 온 그 병아리색의 상의는 어쩌다 그녀의 옷장에 걸려 있던 옷이 아닐 것이다. 변호인단의 변론 전술에 따라서 시각정보 소통의 세밀한 부분을 고려하여 전문가가 색깔과 디자인과 브랜드까지 정한 결과물일 것이다. 노랑과 브라운으로 각 각 순한 느낌을 주지만 동시에 똑떨어지게 조화되지는 않아 둔하게 보이는 색의 조합을 썼다. 날렵하고 눈에 뜨이게 자신만만한, 따라서 상대방에게 무언가 힘을 가할 수 있는 이미지를 적극 배제해야 했고 결국 답답하고 딱한 동네 아줌마를 그려낼 수밖에 없었다.


킴벌리 포터의 재판은 이미 배심원단의 평결까지 나왔다. 백인이 주를 이루고 소수의 흑인과 아시아계로 구성된 배심원단은 포터가 유죄라고 판단했고 이제 판사의 형량 선고만을 앞두고 있다. 변호인단의 시각정보 조종이 제대로 구실을 못했을까? 아니면 그 반대로 매우 효과적이라 킴이 공권력을 행사하던 사람치고는 너무 아둔하고 무책임해 보여 그 점이 불리하게 작용했었던 것인가? 또는 이미지 메이킹 자체가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었을까? 만약 드라마에서 흔히 보듯 킴이 좀 더 노련한 변호인단을 고용했더라면 더한 고도의 이미지 메이킹을 통하여 그녀에게 무죄가 선고되도록 할 수 있었을까?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사실 관계 자체의 이해도 달라지는 이런 사건에서 누구의 어떤 계산이 평결에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 재판에서 분명히 느낄 수 있는 것은 이렇듯 시각 기호를 사용한 정보의 소통 혹은 조종이 우리 곁에 매우 가깝게 있다는 사실이다. 이 시각적 정보는 우리가 의식하거나 의도하지 않는 중에도 끊임없이 우리 주위를 에워싸고 우리의 사물 인식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문자를 중요시하는 현대 교육 과정을 거쳐온 우리 대부분은 이미지 읽기에 서툴다. 그림책의 그림은 글자를 모르는 어린아이들을 위해, 그들의 즐거움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무심히 넘겨 버린다. 그러나 이미지를 사용한 광고가 24시간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환경 속에서 무심한 관망객의 역할만 하기에는 무언가 내가 나의 권리를 제대로 존중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킴벌리 포터의 재판 같은 사건에 배심원으로 참여한다면 그녀의 변호인단들이 벌이는 이미지 메이킹의 한 판 게임을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판결을 내리고 싶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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