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아닌 것은 그 이름으로 부를 수 없다.
GAP이라는 미국 캐주얼 의류 브랜드가 위용을 떨친 때가 있었다. 각을 세워 길게 뽑은 이 알파벳 로고를 특히 청소년들이 좋아했다.
가격이 캐주얼로는 상당했지만 잘 팔렸을 것이다, 길에 나서면 쉴 새 없이 그 빳빳한 로고 붙은 옷이 보였으니까.
그 후 캐주얼 의류 시장이 다양해지고 저가를 표방하는 브랜드까지 등장하면서 GAP의 위세는 사그라들었다.
이미지를 소비하는 고객은 늘 변덕스러운 만큼 이제 각진 알파벳 대문자의 로고가 특별해 보인 시간이 지났다는 뜻이다.
이런 소비자를 붙들기 위해 브랜드는 이미지를 진화시키는 스토리텔링을 시도한다.
2010년에 GAP은 그 시도로 로고 이미지를 바꾸었다.
부드럽게 굴린 글자형으로 대, 소문자를 혼용하는 Gap으로 고치고 글자 사이즈도 줄였다.
거의 다른 이미지였다.
무엇보다 소비자의 말초 신경을 자극하는 힘은 눅었고 대신, 무엇이랄까, IT 회사의 로고 같은 ‘힙’한 신뢰감이 보였다. GAP이 기성세대가 된 전성기 때의 고객을 노린 전략이었을까? 어쨌건 캐주얼 의류의 로고이기에는 많이 얌전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소비자는 이 로고를 보지 못했다. 발표된 지 일주일 만에 다시 원래의 로고로 돌아간다는 결정이 났기 때문이다. 매스컴에 발표된 로고를 보고 사람들이 매우 부정적으로 반응한 것이 그 이유라고 전해졌다. 이 로고 변화를 시도한 임원은 몇 달 안에 사표를 썼다.
GAP이든 Gap이든 그 내용물은 전혀 변화가 없음에도 변화하는 생물인 이미지는 간단하지가 않다. 특히 대중이 같이 소비하는 이미지의 힘은 이토록 무섭다.
그렇다면, 상품의 내용이 변하면서 굳건한 브랜드 로고 이미지도 맥을 추지 못하는 “정상적인” 예를 한번 들어보자. 캐주얼 의류 브랜드의 사활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중차대한 미국 대법원의 이미지 이야기다.
미국의 대법원은 중대한 사회적 이슈의 잘잘못을 판단해 주는 최고 지혜의 보루로 인식되어왔다. 검은색 법복을 입고 두 줄로 서거나 앉은 모습으로 대중에게 소개되는 7인 혹은 9인의 판사가 바로 삼권분립의 사법부, 그중 최고의 의사결정체인 대법원 그 자체다.
무엇보다 이들은 인간사 굴곡의 정수를 파악하고 인간의 법을 적절히 읽어 내어 마지막 결정을 내려주는, 말하자면, 모두의 마지막 보루였다.
개인으로는 매스컴에 거의 오르내리지 않는 법관들의 검정 법복 차림의 단체 사진이 그들의 이미지 로고다.
검정 법복을 입고 부드러우나 근엄한 표정을 지은 60대 정도의 남성 7인의 초창기 사진에서 한 두 명씩 여성 대법관의 모습이 들어가는 9인의 사진으로 변했다. 2018년 이후로 세 명의 새로운 그리고 젊은 대법관의 임명으로 사진이 바뀌면서 이들의 '근엄하면서도 부드러운' 표면 이미지도 많이 변했다.
말하자면 대법원의 로고가 바뀐 셈이다. GAP이 Gap으로 되는 정도다, 표면 상으로는.
그 검정 법복의 위용 로고에 새로운 스토리텔링이 붙는 셈이었다. 젊으면서도 지혜와 지식을 갖춘 “천재”들이 변하는 인간 현실을 제대로 보고 판단을 내린다는 희망을 표방할 터였다.
젊다고 하지만 모두 50세 근처를 넘나드는 나이들이라 인생사 경험이 짧을 걱정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여전히 믿고 기대는 ‘마지막 보루’의 이미지가 될 예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을 일이 일어났다.
2018년 트럼프 행정부 당시 인준된 브렛 카버노우(Brett Kavanaugh) 판사의 임명 과정에서 심상치 않은 논란이 있었다.
그가 대학 시절 알고 지냈던 여성이 카버노우의 대법관 자격에 이의를 제기한 것이었다.
대학 교수 신분인 이 여성은 카버노우의 과거 행실을 들며 그가 대법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30여 년 전의 대학 초년 시절 일어난 일로 그 내용을 들어보면 그가 지인이던 해당 여성을 성폭행하기 직전에 주변의 개입으로 멈추게 된 사건이었다.
더불어, 그의 부유층 프레피 보이의 충동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성장 과정이 도마에 올랐다.
카버노우는 공부에 대한 압박감을 어떤 방법으로 풀어 버려도 아무런 제제도 받지 않는 삶을 살며 성장했다. 그의 고등학교 졸업 앨범에는 그 스스로 자신을 설명하는 말로 근처 학교의 여학생 지인인 리나타를 언급하며 "리나타 동창생"(Renate Alumnius)이라고 썼다. 그와 친한 친구 여러 명도 같이 쓴 그 말은 언급된 이름의 여성과 모두 쉽게 (또 반복적으로) 성관계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등학교 3학년이 자신들의 자신만만한 방탕함을 자랑하면서 동시에 상대 여학생의 인격을 말살해버리는, 저급한 치기와 악랄함을 거리낌 없이 즐기는 행태였다 (세 명이 그 말을 설명한 내용이 모두 달랐고 전부 성관계는 없었다고 부인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카버노우는 계획대로 유수한 법대에서 공부하고 법률가가 되었다. 그 후에 판사가 되고, 이제 대법관의 지위에 오르기 직전까지 온 것이다.
그가 '마지막 보루'의 자격이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자격 없다.'
대학 초년 시절 파티에서 그에게 성폭행당하기 직전까지 간 그 여성은 자신의 사생활이 대중에 노출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를 멈추려고 나섰다. 믿고 기대는 대법원이 산산조각 나는 것을 막기 위한 결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개인의 힘으로 달리는 열차를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시작했다는 그녀의 말처럼 카버노우의 인준은 멈추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녀의 말이 신빙성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는 어릴 적에 일어난 일이니 따질 수 없다는 결론으로 내달았다. 정작 카버노우 본인은 그런 일이 없었다고 우기니 그녀를 믿는다면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인데 거짓말쟁이가 모두가 의지하는 대법원의 지혜와 판단의 보루가 되어도 괜찮다는 것이었을까?
그런데 사실 오래전, 1991년에도 이 보루가 흔들릴만한 사건이 있었다. 카버노우보다 27년 전이니 아마 미국 대법원 역사 초유의 지저분한 대법관 후보 인준 과정이었을 것이다. 해당 판사의 특유한 개인 상황이라고 그때는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하나의 전조였다. 대법원 브랜드의 몰락이 시작된 것이 분명했다.
1991년.
최초의 흑인 대법원 판사가 은퇴하자 그 자리에 역시 흑인 법관이었던 클래런스 토마스(Clarence Thomas) 판사가 추천되어 상원 인준을 받게 되었다.
당시에 뉴스 미디어는 날마다 잔치판이었다.
토마스가 판사 노릇을 할 때 여기저기서 날린 성추행 발언으로 신문 지면은 황색으로 물들 지경이었다.
당시 그의 추잡한 행동이라고 진술된 것을 보면, 자기를 보조하는 여자 법원 서기에게 '(내 책상 위) 콜라 캔에 누가 음모(陰毛)를 얹어 놓았어' 정도의 코멘트를 예사로 날리는 것, 성기 크기로 유명했던 흑인 포르노 배우와 자기를 비교하는 언사 등. 그리고 자신은 기혼임에도 부하 직원에게 데이트를 신청하곤 했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이런 추접스러운 행태를 이름하여 성추행이라고 깔끔하게 조어를 해놓았지만 직설적으로, 자기 부서의 여직원에게 끊임없이 지분대는 사이코 변태 상사의 행태였다.
그 여자 서기는 아무 말 없이 들어 넘겼다. 자기 장래의 법관 진로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자기가 모시는 법관이다. 그러나 마음에 새기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수십 년이 지난 후 그 판사가 종신직인 대법원 판사가 되려는 찰나에 그를 멈추기 위해 스스로 나선 행동이 이를 증명한다. 상원 인준위 증언 당시 그녀는 모 대학의 법대 교수 신분이었고 같은 흑인이었다.
클래런스 토마스 후보는 상원 청문회에서 지금 자기에게 가해지는 것은 “성공적인 흑인을 향한 (미국 사회의) 하이테크 린치”라고 받아쳤다. 린치라는 말의 린 자만 나와도 뒤가 구릴 수밖에 없는 미국 주류 사회를 공개적으로 협박하는 것에 다름없었고 상원은 그를 인준하였다.
정말 들어 본 적이 없는 대법원 판사 이미지의 추락이었다.
임명 후 오랫동안 클래런스 토마스는 대법원 판결 건에 가 부 표시만 하였을 뿐 자신의 의사 개진을 하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 그 침묵을 깨고 그가 무언가 발언을 하기 시작한 것은 임명 후 거의 삼십 년이 지난 트럼프 행정부 시절부터였다.
임신 중절권을 헌법이 보장하는 개인의 기본 자유 권리로 보지 않는다며 행정부의 개입을 허락한 최근의 대법원 판결에 토마스 대법관과 카버노우 대법관 모두 찬성 의견을 냈다. 토마스 대법관은 찬성 의견에 덧붙여 서면으로 아래 의견까지 남겼다.
"임신 중절권뿐만 아니라 동성 간의 결혼이나 피임(방법) 등의 이슈도 헌법에 보장된 개인 권리가 아니라는 점에서 다시 (행정, 법률적) 논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자신이 돌아보건대 인간은 성적인 문제에 있어 제대로 사리 분간할 능력이 부족하니 법이 개인의 침실까지 들어가 판단해 주어야 한다는, 개인 경험에서 나온 판단이라고 보아야 할까?
로고의 변화보다 상품 자체가 변한 것이 이미지의 변질을 몰고 왔다.
이미지의 이해는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다중이 서로 소통하는 방법이 된다.
대법원 판사들의 판단에 대해 잠시 경청하고 곱씹어보는 그런 다중의 반응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 인구의 반은 대법원의 판단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한다.
'법원의 판단을 존중합니다. 그러나 동의하지 않습니다'가 아니라 대통령도 하원의장도 '정치색에 쩐 대법원이 돌았다'는 뉘앙스로 그들의 판결을 평가한다.
검은 법복을 입은 9명의 판사들의 2022년 로고.
목에 화려한 칼라를 붙인 여성 법관에, 활짝 웃는 모습이 다수다. 장식적인 칼라나 또 장식적인 웃음은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이 현실세계에 발을 딛고 있는 새로운 지혜와 판단의 신호라면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검정 법복을 장착한 이 9인의 이미지는 더 이상 모두가 마지막으로 기대는 보루를 신호하지 못한다.
최소한 세 법관은 인준 청문회에서는 기존의 기본권으로 판단된 판례를 부정하지 않는다고 답변하고서 실제 임신 중절권 판결에서 이를 뒤집었다. 하원 의장 낸시 펠로시 말을 빌리면 “저런 따위 위선자들”이다.
최소한 두 남자 법관은 증인이 수두룩한, 단지 기소되고 재판받지 않았을 뿐인 ‘성추행’ 의혹범이다.
그리고 최소한 네 명은 거리낌 없는 거짓말쟁이다.
정치색의 문제가 아니다.
입을 활짝 열고 웃는 모습의, 검은 법복을 입은, 남, 녀, 흑, 백이 골고루 분포된 사법 최고 결정권자들의 이미지는 이제 갈대로 간 이 세상의 추하고 복잡하게 꼬인 이해관계를 신호한다.
이 새로운 로고의 이미지는 나아가, 부드럽지만 근엄한 얼굴을 보이는 옛날 옛적의 대법관 로고까지도 의심의 눈을 가지고 보게 한다. 혹시나 그 법복 아래에 뭔가 시커먼 비밀들이 들어앉아 있었지만 대중들은 모르고 지내온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다.
GAP 로고를 보며 옛날에는 이것이 “힙”의 상징이었다는 것인데라고 느끼는 감정은 격세지감이라고 불러도 되겠지만 대법관의 단체 사진 이미지는 그렇게 간단하게 이해하고 넘어갈 수 없다.
이들의 결정에 개인의 인생 전체가 달려 있는 경우가 많은 것이 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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