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을 읽어본다 16: <떠돌이 개>
<The Stray Dog> Marc Simont 2001 HarperCollins Publishers
“x는 개를 좋아하지 않는다.”
지인의 거실 마루에 종횡무진 노니는 네 마리의 치와와를 보고 잠깐 아연실색하였는데 졸지에 나는 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어째 욕처럼 들렸다.
키우던 치와와가 낳은 새끼 세 마리 중 어느 것도 남에게 주기 싫어서 개 네 마리를 키우고 있는 주인에게는 내 행동이 섭섭하기도 했겠다. '아이고 예뻐라' 하고 개를 덥석 안고 만지고 했어야 했는데, '아니, 개 네 마리... 옴마야..'가 물론 나의 발설하지 않은 첫 번째 반응이긴 했다.
저기 어디 오스트리아인지 유럽의 살기 좋은 나라에서는 할머니들이 곱게 차리고 개를 끌며 시내를 다니고, 누가 개를 데리고 걷다가 잠시 길 가의 쇼윈도라도 들여다보고 있으면 '이것 봐요, 개가 가고 싶어 하잖아요'하고 그런 할머니들이 참견에 훈수까지 둔다고 하니, 개 사랑은 "문명인"의 필수 요건 인지도 모르겠다.
옛날에는 동네 집 집마다 개들을 키웠다. 도둑이 많으니 집 지키는 개였다. 개는 대부분 마당에, 개 집 앞에 묶여 있었다. 하루의 대부분을 개줄에 묶여 있는 개는 지금의 아파트 안의 개보다 스트레스가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우리 집에는 한번 풀리면 마루 위로 방으로 쳐들어오는 개, 우리 같은 애들은 무서워서 근처에도 못 가는 개, 스트레스가 극도로 쌓여 밥 주는 엄마를 물어버린 개 등 등이 있었다. 그중 최악은 쥐약을 먹고 우리 마당에서 죽어 넘어진 쥐를 파먹고 숨이 넘어가는 쫑이었다. 엄마가 아침마다 마당 구석구석 죽은 쥐가 없나 살피는데도 이 사태를 막지 못했다. 오빠가 호스로 물을 먹여 보지만 눈이 풀린 쫑은 죽어가고 있었다. 눈앞에서 생명체가 죽어가는 모습은 보기 힘들었다. 그래서인지, 아니면 정말로 동물을 사랑할 줄 모르는 야만인이어서인지 개를 덥석 안거나 혹은 개를 키우고 싶다는 마음이 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친구의 카톡 대문에 실린 친구와 그녀의 개 사진을 볼 때마다, '저 개를 어쩌려고…’를 읊조린다. 야만인이라고 불려도 할 수 없다. 예쁜 줄무늬 개 셔츠까지 입고 친구에게 꼭 안겨 같이 카메라를 응시한 사진 속 몰티즈의 눈을 보면 의기양양이 넘치고, '나 봐-라, 나 이 집에서 제--일 높아'라는 말이 그냥 들린다. 하긴, 하루 종일 주인 쫓아다니는 걸 다 받아주고 밤에는 침대에서 같이 재운다니, 그 집은 부부가 침실을 따로 쓰고 있으니, 경쟁자 없는 일인자 맞긴 한데…
어찌하였든, 어쩌다 늦은 밤에 TV를 틀어도 자주 개 쇼를 보게 되는 것을 보면 우리의 주요 관심사 중의 하나가 애완견과 함께 살기인 것만은 분명하다.
그것이 "문명인"이 되는 순서라 우리도 순차적으로 따라가는 것일지, 애완동물 문화에 이미 앞서 가는 서구인들의 개 사랑은 유별나고 어린이 대상 문학은 개 이야기로 넘친다.
공원에 놀러 온 한 가족에 접근해 음식을 얻어먹고 함께 어울린 떠돌이 개와, 천진난만하게 그 개와 놀다 집으로 돌아갈 때 개를 데리고 가고 싶어 하는 남매, 그리고 '주인이 있을 것이니 안된다'라고 핑계 대며 거절하는 부모의 이야기, <떠돌이 개>다.
한 때 <떠돌이 개>는 나의 최애 그림 동화책이었다. 한국 시장에서 별로 인기가 없어 3,4천 원에 덤핑 하듯이 팔아 치우는 것이 안타까워 그때마다 여러 권 사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주곤 했다.
떠돌이 개와 아이들이 노는 모습, 특히 떠돌이 개 감시원이 나타나 목 줄도 없는 개라면서 잡아가려 할 때 아이들이 급하게 허리띠를 빼고 머리 끈을 풀어 보이며 '우리 개'라고 하는 모습의 묘사가 너무도 생생하여 그 책이 좋았다.
처음 만난 날 개를 두고 떠난 식구들이 일주일 내내 그 개가 마음에 걸려 되는 일이 없다가 그다음 주말에 부리나케 공원으로 달려가고, 감시원의 그물에 걸린 개를 용케 빼내 집으로 데리고 온 해피엔딩의 이야기다.
해피엔딩.
그것이 문제다.
해피엔딩이 그렇게 나쁩니까?*
해피엔딩이, '이 크고 견고한 체제에 조용히 복종하는 것이 행복해지는 길이다’라는 메시지를 따라 나올 때 그렇다.
그 렇 게 나 쁘 다.
마르끄 시몬트의 그림은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본 시각을 많이 사용하여 그 아래에 펼쳐지는 인간사 혹은 인간들이 아주 조그만 존재로 느껴지게 묘사되어 있다.
개를 처음 보고 공원에서 돌아오는 길.
어둑어둑해진 시간에 육중한 사각의 빌딩 사이를 가로지르는 또 육중한 다리 위를 지나오는 조그만 차 속에 앉아 있을, 그림에는 보이지도 않는 어린 남매의 모습이 바로 그 느낌의 결정판이다. 진한 유화풍으로 어둡게 그러나 따듯하게 채색된 삽화는 하늘 저 위쪽 어디에서 들려오는 듯한, ‘걱정 말고 복종하여라. 그러면 모두 행복할 것이니’라는 말을 그려 보여주는 듯하다.
그리고 복종교 입문의 마지막 수순은 떠돌이로 아무렇게나 살아온 근본 없는 전력을 뜨거운 김이 가득한 욕실에서 깨끗이 씻어버리는 것이다. 체제 입문 준비다.
김이 올라와 흐릿하게 보이는 욕실에서 남매와 떠돌이 개-이제는 윌리다-가 함께 목욕 삼매에 빠져 있다. 샴푸와 빈대 스프레이와 이 제거 로션이 여기저기 보이고, 한없는 비누 거품까지, 정화의 환희가 느껴진다.
시몬트는 뜨거운 김으로 싸인 목욕 장면을 두 페이지로 크게 잡아넣으면서 쾌적하지 못했던 과거 따위는 말끔히 닦아내고 새 존재로 태어나면 무조건 행복하다고 선전하고 있는 것인가?
‘그럼 더러운 개를, 빈대와 진드기 범벅인 개를 그냥 들여? 말도 안 되는 소리! 떠돌이 개 못 봤구나?’
당연히 못 봤다. 빈대? 잡아야지. 진드기도 이도 없애야지. 누가 뭐래. 그런데,
그쯤에서, 19세기 말에 심지어 20세기 중반까지도 미국과 캐나다 정부가 인디언 원주민들을 야만적이라고 부르며 그 아이들을 대신 양육하겠다고 빼앗아 간 역사가 떠오른다. 정부 단체가 그 아이들을 강제로 데리고 가 시도한 동화와 정화의 훈육으로 그 아이들은 인디언의 영혼뿐 아니라 생명까지도 잃게 된 사실을 이 떠돌이 개에 오버랩시킨다면 그건 너무 나가는 것일까?
검고 손질이 안된, 이도 많을 봉두난발을 잘라버리고 양식 옷을 입히고 영어를 가르치면서 인디언의 정체성을 가위질해버린 그 인간 역사는 체제와 인간성의 총체적 실패를 증거 하는 하나의 예일뿐이다.
그것처럼,
삭막한 현실에서는 이런 경우 해피엔딩이 없으므로 그림책의 해피엔딩은 더 무서운 체제 강요로 다가오는 것이다.
뜨거운 김이 서린 욕실에서 커다랗고 넉넉한 욕조에 개와 아이들이 함께 들어앉아 거품을 내며 목욕하는 장면에, 그래서, ‘복종의 강요를 로맨티시즘과 섞어 풀다’라는 해석을 달 수밖에 없다.
그런데,
떠돌이 개의 눈을 들여다보면 시몬트가 이유 없이 그림책 삽화의 대가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살짝 든다.
개는 눈으로 확실히 말한다.
‘이 사람들 괜찮아 보이네,’ ‘음식도 고급지고, 애들 순둥이야,’ ‘저 집에 한 번 따라가면 어떨까,’ ‘아이코, 재수 옴이야! 감시원 그물에 걸렸네,’ ‘야, 쟤들 봐, 바지 벨트 풀어내느라 정신없네. 잡혀갈 걱정 안 해도 되겠어.’
그리고 욕조에서,
뜨거운 물과 김의 안락함에 푹 빠진 듯 보이지 않는 유일한 존재는 윌리다. 그의 눈은 차라리 말똥말똥하다. ‘얘들, 글쎄, 오버한다, 장단 그냥 맞췄더니…’
마르끄 시몬트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진짜 이렇게 입양될 결심을 했던 것인지 개한테 물어봤냐고.
개 사랑이 우리가 문명인임을 증거 한다고 믿고 있다면 더욱더 물어봐야 할 것 같다.
자세히도 봤네요.*
그렇다. 작은 것일수록 자세히 보아야 한다. 아이들도 자세히 본다, 못하게 막지만 않으면.
* <헤어질 결심>(2022, 박찬욱))의 대사를 원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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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right 2022 Jane. (삽화 Copyright 2022 m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