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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 Oct 01. 2023

완전한 가을을 그리며

그림책을 읽어본다 27: <Ox-Cart Man>   (소 수레 아저씨)

<Ox-Cart Man>      Donald Hall       Barbara Cooney      1979        Puffin Books


이제 여름은 멀리 갔다.

얼굴에 스치는 시원한 바람을 느끼는 첫 순간에 이제 선선한 가을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래, 인제 편하다'라고 잠시 생각하다가 어떤 계절도 더 이상 우리를 안심시키지 못하는 세상이라는 것을 깜짝 깨닫는다. 가을 태풍까지 다 지나갔다면 이제 눈바람에 맞서야 되는 겨울이 오는 것이다. 막 지나간 여름도 우리에게 깊은 생채기를 내고 물러갔지만 또 다른 고난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준비시킨다.

그래도 잠깐만이라도 그런 무서운 기억이 없었던 것처럼 저물어 갈 한 해를 제대로 보듬어주고 오는 겨울을 잘 살아 낼 수 있게 준비시켜 주는 그런 가을을 그려보고 싶다.


그럴 때 꼭 생각나는 책이 바바라 쿠니의 <Ox-Cart Man>이다. 19세기말 미국 북동부 농가의 삶을 그린 이야기로 1917년생인 쿠니가 그림 인생 40년에 최고 권위인 칼데콧(Caldecott)상을 받은 작품이다. 1958년의 첫 번째 수상 후 20년 만의 수상인만큼 그림에서 그녀의 공력이 느껴진다.


Ox Cart는 말 그대로 황소가 끄는 수레로 미국 서부 개척 시대를 다룬 영화에서 많이 보는 포장마차 같은 짐수레다. 제목에 수레란 말이 들어갔지만 이 이야기는 보통의 농부의 삶을 다룬다. 미국 농부 이야기라, 무언가, 우리에게서 한 발짝 떨어져 있는 감성일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슴 저 속에서 울리는 것이 있다. 일 년의 노동 끝에 오는 결실을 담담하게 맞는 농부의 모습을 그리는 이 그림책은 동 서양의 우리 모두에게 낯설지 않은 인간 세상의 집합적 추억을 보여준다.


이야기의 시작은 농부가 마차에 소를 매고 시장에 내다 팔 물건들을 싣는 장면이다.

오늘이 그와 가족들이 한 해 동안 기르고 만들어 낸 소출들을 도시로 내다 파는 결실의 행사 날이다.

농부는 수레에,   

키우는 양에서 얻은 양털, 그의 부인이 그 털로 실을 자아 짜낸 담요, 그 털실로 딸이 만든 장갑을 싣는다.

부인이 아마에서 실을 자아 짜낸 면포와 아들이 만든 빗자루, 그리고 자신이 나무를 쪼개 만든 지붕 널빤지도 싣고, 가족들이 함께 만든 양초와 겨울 내 채취하고 끓이고 졸여 만든 메이플 설탕도 싣는다. 그리고 한 해 동안 먹을 만큼 남기고 여분의 감자, 양배추, 사과도 싣는다. 마지막으로, 집 주변의 거위들이 떨궈 놓은 거위털을 주워 모은 보따리도 싣는다.

이것이 전부다.


이 물건들을 수레에 차곡차곡 싣고 농부는 길을 떠난다. 옷을 깨끗하게 차려입었다. 셔츠와 조끼에, 부츠를 신고 모자도 쓰고 재킷까지 입었다. 장터에 나가 필요한 물건을 사고파는 일이 아니라 일 년의 노동을 결산하는 '읍내 출입'에 걸맞은, 소박하지만 깨끗한 농부의 차림새다.


인근 도시인 포츠머쓰(Portsmouth)까지는 장장 10일의 대장정이다. 농부는 수레에 타지 않고 소 앞에 서서 같이 그 길을 걷는다.


포츠머쓰에 도착한 농부는 가지고 온 모든 물건을 판다. 그가 생산하고 키운 모든 것들, 수레도 팔고 같이 걸어온 소까지 판다. 그리고 네 가지 물건을 산다.

아내가 쓸 무쇠 솟과 딸을 위한 자수바늘을 산다. 멀리 영국에서 수입되어 온 좋은 바늘이다. 그리고 아들이 빗자루를 만들 때 부엌칼 대신 쓸 수 있도록 제대로 된 칼을 산다. 모두 쇠로 만들어진 것들로 농부인 그가 만들지 않는 물건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온 가족들을 위하여 박하사탕을 산다.

더도 덜함도 없이, 지난 일 년을 결산하고 앞으로 올 일 년을 기약하는 행위다. 간결하고 적당하고 소박하다.    


그는 칼과 바늘과 박하사탕이 든 무쇠 솟을 매고 온 길을 되짚어 집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간단한 시골농부의 가을 결산 이야기인데 쿠니의 삽화는 이것을 농가의 결핍 없는 소박함과 그것에 대한 자신감의 이야기로 만들어 놓는다.

먼저 쿠니가 표현하는 결핍 없는 소박함을 찾아보자.    

이들의 집안 내부는 1층의 넓은 공간 한쪽을 부엌으로 만들어 벽 앞으로 장작불을 피우고 그 위에 솥을 걸어 취사를 하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19세기 서구 농촌 가옥의 전형적인 모습일 것이다. 이 불로 난방도 함께 하니 부엌 주변이 집안의 중심이다. 불 앞으로 가족들이 둘러앉을 수 있게 나무로 만든 의자가 있고 한쪽으로 식탁도 보인다. 불기가 앞으로 향하도록 벽돌로 양쪽을 막았고, 불 앞으로는 넓게 벽돌 타일을 깔아 나무바닥으로 불씨가 튀지 않도록 했다. 장작을 직접 때어 취사와 난방을 하는 원시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구조이지만 가족의 안전을 생각지 않고 함부로 펼쳐 놓은 살림살이가 아니라는 것을 신호한다.

또,

농부가 일하는 헛간도 들여다보자. 헛간 문을 활짝 열어 놓고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을 받으며 농부는 멍에를 깎아내고 있다. 이제 겨울 동안 마저 크면 농사를 도울 어린 소를 위한 멍에다. 그의 옆으로 아들이 서서 바닥에 떨어지는 나무 부스러기를 쓸어 담고 있다. 바닥을 말끔하게 마루로 깔았고, 역시 긴 나무판자로 한쪽 벽에 깨끗하게 붙여 세운 건초 칸에는 건초가 쌓여 있고 그 옆으로 어린 소가 앉았다.

단출한 헛간 문 밖으로 눈에 덮인 산과 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부자가 맡고 있을 싸늘한 공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그러나 부자는 겨울 차비를 넉넉히 하고 있다. 겉옷을 제대로 입고 모자와 목도리에 장갑도 착용하고 겨울 부츠까지 신고 있다. 추운 날씨를 참고 견디는 노동이 아니라 겨울 산골의 청량한 햇살과 공기를 느끼며 겨울 일을 하고 다가올 봄을 준비하는 모습이다.

위도가 높은 뉴 잉글랜드의 겨울은 길다. 3월에도 아직 녹지 않은 눈 밭 한가운데에서 이 식구들은 겨울 내내 받고 있던  메이플 수액을 걷어들여 끓인다. 모두들 단단히 겨울 차림을 하고 일하는 중이다. 계절의 혹독함에 인고하는 시골 농가의 모습을 쿠니는 용납하지 않는다. 소박하나 사람을 쉽게 대하는 모자람은 없다.


결핍 없음을 중요시하는 동시에 쿠니는 농가의 소박한 자신감을 전한다. 흰색을 사용했다.   

표지와 첫 장면에 등장한 그의 흰 소와 짐수레의 흰 포장은 처음부터 심상치 않았다. 그리고 매 페이지마다 흰색이 사용되어 채색이 강하지 않은 화면에 힘을 부여한다.

집과 헛간의 전체 실루엣을 흰색 테두리로 처리하고 창틀까지 눈이 부시게 흰색으로 칠했다. 휜 테두리는 빨간 벽의 헛간을 더 도드라지게 부각한다.

흰색 셔츠를 입은 농부가 마당에 앉아 양털을 깎고 있다. 하얀 양 세 마리와 새끼 한 마리다. 털을 깎아낸 양은 더 하얗다. 화면이 환하게 빛난다.

찬 공기와 햇살로 인해 볼이 발갛게 탄 농부의 아내가 쓰고 있는 하얀 작업 모자가 화려해 보이기까지 한다. 겨울 내내 집 주변 산과 들을 덮은 흰 눈은 살을 에는 겨울 추위가 아니라 겨울 동안 잠자는 사물을 보호해 주는 포근함으로 느껴진다. 농부의 가족도 그 아래에서 겨울을 보내고 그리고 봄을 맞는 것이다. 봄 들에서 작물을 심는 가족들 옆으로 사과꽃이 하얗게 피었다.

겨울을 제대로 보내고 새로운 생산의 시간을 맞이하는 가족들의 여유와 자신감은 이렇게 환하게 축하할만하다.                       


필요한 것은 다 있고 필요 없는 것은 한 올도 없는 모습으로 구성한 바바라 쿠니의 삽화는 거의 종교적인 신념처럼 인간 노동의 신성함과 그것의 결과에 대한 자부심을 그려내고 있다. 필요한 것만을 소유하고 최소한의 물자를 소비하며 살아가는 19세기 미니멀리즘의 풍요는 마음을 울린다.   

 

그러면서도,

<Ox-Cart Man>이 드러내는 인간사의 초 긍정 해석은  21세기 초입의 험한 세상을 사는 우리에게 패배감을 안겨줄 수도 있다. 인간의 존엄이라는 말 자체가 무색한 이 세상 혼돈 속에 우리가 간신히 버티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가 떳떳한 가을이 이런 세상에서도 가능하다고 믿고 그것을 향해가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Ox-Cart Man>은 단지 그런 노력을 지지하고 있다고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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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right 2023 J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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