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소의뿔 Sep 12. 2022

불러도 대답 없는 이에 대한 그리움

할머니를 그리며


오수희. 내 할머니의 성함이다. 소천하신지 20년도 더 지났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인가, 3학년이었을 때 쓰러지신 후 중풍으로 3년 정도 누워 계셨다. 살아생전의 할머니 모습이 이상하게도 어제오늘 계속 떠오른다. 할머니를 향해 이야기를 건넨다. 정확하게는, 할머니에게 내가 너무 몰랐다고, 죄송하다는 말씀을 전한다.


할머니는 하루 종일 누워계셨다. 명절이나 되어야 큰댁에 가 겨우 뵈었다. "할머니 저 왔어요." 그렇게 인사를 하고는 멀뚱하게 앉아있다 방에서 나오고는 했다. 큰손녀가 좀 더 붙임성 있고 애교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저런 나 사는 얘기로 할머니의 귀를 즐겁게 해 드렸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한 번은 나한테 시계를 채워달라 하셨다. 채워드렸는데, 뭔가 마음에 안 드셨는지 계속 뭔가를 말씀하셨다. 나는 끝내 알아채지 못했다. 난감해 하는 내게, 할머니는 그저 웃는 것으로 상황을 마무리했다. 그때 나는 중풍에 대해 너무 무지했다. 말씀은 잘 하지 못하셨어도 듣기는 문제없으셨을 텐데 말이다. 몸은 불편하셨어도 분명 마음과 생각은 건강하셨을 때와 같았을 텐데...


중풍이 어떤 것인지 알았더라면, 할머니와 소통하는 방법에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아쉬움과 속상함으로 속이 쓰라린다. 이미 수십 년 전일인데, 그간 한 번도 느끼지 못한 먹먹함, 속상함, 슬픔이 너무 강하게 밀려온다. 어렵고 힘들기만 했을 것 같은 할머니의 삶을, 돌아볼 때 행복감을 느끼던 추억이 있었을까? 할머니는 누워계시는 동안 무엇을 생각했을까? 어떤 기분이었을까? 그런 상상이 내 먹먹함, 속상함, 슬픔을 자극한 것 같다.


우리의 모든 할머니들의 삶이 그랬듯, 내 할머니 역시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을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이라는 역사의 암흑기에서 보냈어야 했다. 할머니는 한국전쟁이 한창일 때 내 아버지를 낳으셨고, 지금의 내 나이보다 10년이나 어린 때에 가장이 되어 세 남매를 키웠어야 했다. 큰 아들네를 따라 고향을 떠나 도시로 이주한 삶, 할머니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환경에서 무력감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이제는 내 할머니의 나이가 된 큰어머니, 곧 그 나이가 될 내 어머니가 할머니와 오버랩된다. 아, 어쩌면 내 속의 무거운 감정들은 할머니를 거쳐 두 어머니들께로 향하나 보다. 그리고 내세로도 향하는 듯하다. 20년 후에 '그때 그러지 못해 죄송했어요.'라 말하지 않기 위해 조금만 달라져보자. 그들의 삶을 알아주자. 그들의 감정에 관심을 가지자. 그들이 지금 느끼는 기분을 물어보자. 자주, 안부를 여쭙자.


까막눈이던 할머니는 한글을 뒤늦게 깨쳤다. 그리도 좋으셨나 보다. 시간만 나면 성경을 큰 소리로, 민요풍의 가락을 넣어 성경을 노래하셨다. 악보 없는 찬송가도 민요처럼 노래하셨다. 어렸을 때부터 글을 익히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나 보다. 이후에 할머니를 뵙게 되면 꼭 여쭙고 싶다. "할머니, 성경책을 눈으로 읽지 않고 왜 소리 내어 읽으셨어요?" 그러면 내가 알지 못했던 할머니의 삶을 들을 수 있을까?

작가의 이전글 어른과 와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