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시작, 나의 도전기
2살 터울의 아이 셋을 키우고 있는 전업 주부인 나는 아침에 눈을 뜨고 감기까지 거의 주방을 벗어나질 못한다. 먹고 치우고 먹고 치우고. 아, 그냥 부엌데기라고 하는 것이 차라리 편하겠다.
결혼 전, 한때는 자유로운 한 여성으로 살며 나 자신의 커리어를 쌓는 것을 인생의 최대 목표로 여겨왔던 적이 있었다. 간호사라는 직업을 갖고 틈틈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작가로 사는 일, 그러나 결혼과 출산 후 하루 24시간을 온전히 아이에게 집중하며 살다 보니 어느새 경력은 단절되었고, 나 자신의 구멍 난 양말보다는 아이의 입에 들어가는 밥 한 톨이 더 중요한 억척스러운 엄마가 된 것이다.
그러다 문득 밀려드는 감정의 소용돌이.
반복되는 육아와 살림의 소용돌이 속에서 과연 나는 어떤 사람이었고, 뭘 잘했던 사람이었는지 까마득히 잊어버렸다. 개인으로서의 삶보다는 지극히도 타인을 위한 희생이 요구되는 ‘엄마’라는 이름의 나는 마음 저 깊은 곳으로부터 왠지 모를 무기력감과 우울감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이것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엄마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는 모든 여성의 공통적인 감정일 것이다. 그래서 가끔은 밖으로 나가 바람을 쐬어줘야 하고 온전히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막내가 어느 정도 크면서 그런 시간이 때때로 주어진 것 같다.
제일 처음 밥 위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캐릭터를 꾸미기 시작한 것은, 중구난방으로 식사 태도가 제각각인 아이들에게 호기심을 갖게 함으로써 식사 시간에 좀 더 집중을 하게끔 만들려는 시도였다. 그러다가 캐릭터가 들어간 식판에 대한 아이들의 반응이 생각보다 너무 좋아 사진을 찍고 SNS에 올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달아주는 긍정적인 댓글의 영향으로 수많은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그렇다. 손으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 바로 내가 가장 잘하고 좋아하는 일이었다. 때로 아이들 때문에 나의 많은 부분을 잊고 살았다고 생각했었는데, 결국 아이들 덕분에 나의 장점을 찾은 것이었다.
나의 캐릭터 식판식 사진을 본 사람들은 아이 반찬의 레시피 문의부터 캐릭터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물어왔다. 그리고 그 사진을 다른 사람들에게 공유하기도 했다. 몇몇 사람들은 책으로 내보는 것이 어떠냐며 권유하기도 했다. 그 말에 다시 마음속 저 깊은 곳으로부터 폭풍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그림책도 아니고, 감성 팔이 에세이도 아닌, 요리책을? 요리연구가도 셰프도 아닌 내가?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나는 하루 한 번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삶에 활력을 되찾았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에게 공유할 캐릭터를 생각하고, 새로운 반찬을 만드는 것은 분명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밤마다 컴퓨터를 켜고 한 장 한 장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3개월 정도 적으니 A4용지로 100장 정도가 되었다. 그 초고를 가지고 여러 출판사에 투고를 하기 시작했다. 밑져야 본전인데, 연락이 안 오면 어때. 기대 반 체념 반으로 매일 밤을 보냈다.
단언컨대, 그것이 설령 아주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좋아하는 어떤 일을 찾는다는 것은 분명 삶에 커다란 파도를 불러일으킴에 틀림없다. 내 하루에 웃음이 조금씩 늘어난 것도 아마 그즈음일 것이다.
“작가님 맞으시죠? 저희가 작가님의 원고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30여 개의 출판사에 투고를 했을 때쯤 드디어 고대하던 전화를 받았다. 나는 마치 책이 이미 서점에 나오기라도 한 듯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편집자와의 미팅 후에 출판 계약이 성사되었고 더불어 과제를 한 보따리 받아왔다. 요리책이니만큼 출판사에서 요구하는 사진은 약 1000장 정도가 되었다. 각각의 레시피마다 과정 샷이 들어가야 하니 당연한 것이었지만, 아이를 돌보면서, 그것도 식사를 준비하면서 재료를 일일이 손질하고 세팅해서 찍고, 요리 과정을 하나하나 사진에 담는 것은 녹록지 않은 작업이었다. 게다가 이미 찍어놓은 사진들 중에 화질이 좋지 않은 것들은 퇴짜를 맞아 다시 요리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여러 번 일어났다.
사진을 찍느라 식사 준비 시간이 길어지고, 이미 식어버린 식판을 아이들에게 줘야 했다.
어떤 날은 너무 피곤하고 힘들어서 주저앉아 엉엉 울기도 했으니, 사람이라는 게 어찌나 간사한 존재인지.
살면서 이렇게 열심히 살았던 적이 있었나 싶은 몇 개월의 준비 기간을 거쳐 드디어 탈고를 했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시간들인 것만 같았다.
아이들에게 책을 사주러 서점에 갈 때마다 내 요리책을 어느새 찾아서 들고 와서는, “이것 봐, 엄마 책이야!” 한다. 그 순간이 얼마나 뿌듯한지 모른다. 이 도전을 계기로 나는 다시 세 번째 책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다가 다시 또 살림과 육아에 치여 어떤 힘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가 되면 난 잠시 시간을 오래 두고 생각한다. 내 가슴이 뛰는 그 새로운 ‘시작’에 대하여.
사람이 오랜 시간 무기력에 지쳐있을 때, 가장 좋은 해결 방법은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을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 작은 일들이 모여 언젠가는 아주 큰 행운을 가져다줄 것이다. 아주 간단히 얘기해서, 매일 아침 눈 뜨는 순간을 내 인생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면 마음가짐이 조금 달라질 것이 아닌가.
평범한 삼 남매 엄마가 요리책을 출간한 이 작은 도전기는 출산과 육아에 오랜 시간을 지친 모든 엄마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 당신이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아주 작게 시작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