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나의 체육 점수는 늘 바닥이었다. 학급 대표도 도맡아 하고, 음악과 미술에도 소질이 있어 환경 미화에 큰 기여를 했던 반면, 달리기 꼴찌, 체력장 5급이라는 성적은 늘 어린 나에게 무수히 많은 실패와 좌절을 안겨주었다. 그렇게 조금씩 억눌렸던 슬픈 감정은 마침내 배구 토스 시험에서 터지고 말았다. 고소공포증까지 있던 나는 날아오는 공을 쳐내는 것이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높은 하늘을 보거나 내 키의 몇 배가 되는 체육관의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치 몇 미터 아래로 곧 추락할 것처럼 두 다리가 후들후들거렸다. 결국 공을 한 개도 튕기지 못하고 주저앉아 엉엉 울고 말았다. 1점이 목숨 같았던 학교 성적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체육 시간이 나에겐 두려움이자 큰 장애물이었다.
그후에도 고질병같은 고소공포증은 길지 않은 내 인생에 심어진 수십개의 과속방지턱처럼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이를테면, 친구들과 함께 놀러간 놀이공원 대관람차 안에서 고개를 푹 숙인채 발등만 바라보던 순간. 살던 집을 옮겨 난생처음 높은 층의 아파트로 이사를 가 단한번도 베란다 밖을 내다보지 못했던 순간. 생애 첫 해외여행에서 비행기 이륙의 찰나에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던 순간들 말이다. 텔레비젼으로 스키점프나 다이빙, 번지점프의 장면이 나와도 질끈 눈을 감았다.
시간은 흐르고 나도 결혼을 했고 첫 아이가 생겼다. 엄마라는 새로운 이름이 생긴만큼 살아온 대부분의 시간들은 희미한 기억이 되었고 아이와 함께 나도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아이가 자라면서 바라보는 모든 우주가 엄마의 모습에서 비롯된다는 말처럼, 아이는 나의 그림, 나의 음식, 나의 모든걸 좋아했다. 아니, 참 별것 아닌 것들에도 굉장한 탄성을 지르며 감탄했다. '우리 엄마는 못하는게 없어' 아이의 그 말을 들은 뒤로는 아이의 요구사항을 더 완벽히 해낼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러다가 아이와 함께 놀러간 공원에서 또 한번 과속방지턱이 고개를 내민 것이다. 아이는 나무 위에 걸린 종이비행기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고 그걸 꺼내줄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나무에 걸린 비행기를 올려다보는데 다리가 또 저려오기 시작했다. 꺼내줄 수 없을 것 같은 내 표정을 본것인지 아이의 눈에 달구똥같은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고, 마치 그 순간은 엄마로서의 첫 실패의 순간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학창시절 그토록 나를 옭아매던 고소공포증, 그까짓거 정말이지 없애버리고 싶었다. 두 눈에 비행기만을 담았다. 하늘을 보지 말자, 하늘을 보지 말자. 비행기를 향해 나무 위를 올라갔고 쭉 뻗은 손 끝에 비행기가 닿았다. 비행기를 툭 쳐냈고 나는 땅으로 고꾸라졌다. 엉덩이가 좀 아팠지만 아이의 행복한 얼굴을 보니 몇번이라도 다시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살면서 우리는 크고 작은 수많은 실패를 경험한다. 특히 실패는 두려움으로 낙인되어 마치 고소공포증같은 고질병처럼 나를 끈질기게 따라다닌다. 하지만 고소공포증이 있다고 해서 높은 곳에 서있는 내가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것은 우리가 만들어낸 허구의 것인지도 모른다. 정상에 오르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 아래의 수많은 계단들은 실패가 아닌 하나의 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완벽하지 않은 우리는 모두 실패가 아닌 과정을 살아가는 것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