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을 잘 아는 어른으로 살고 싶다

<오만과 편견>

by 제인톤
"편견은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못하게 하고 오만은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할 수 없게 만듭니다."


<오만과 편견>을 읽고


"나는 지금 오만한가?"

책을 덮는 순간, 이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오만함을 깨닫고 부끄러워하는 장면을 읽으면서, 나 역시 누군가를 섣불리 판단했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녀는 그렇게 현명한 사람이었는데도 오만함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괜찮을까? 내가 가진 오만과 편견은 무엇일까. 대상은 무엇이고, 그 내용물은 무엇일까.



<오만과 편견>의 엘리자베스를 보며 깨달았다. 가장 현명하다고 느낄 때, 가장 위험하다는 것을. 그녀는 베넷 가문의 둘째 딸로, 다섯 자매 중 가장 똑똑하고 재치 있는 인물이었다. 아버지조차 그녀의 판단력을 믿었을 정도로 현명했다. 그런 그녀가 다아시를 처음 만났을 때, 단 한 번의 무도회와 주변의 소문만으로 그를 완전히 규정해버렸다. 오만하고 무례한 남자. 그녀의 판단은 확고했다. 자신의 눈과 귀를 믿었으니까.



그런데 모든 오해가 풀리고 나서야, 엘리자베스는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다아시의 일부 행동이 편견을 만들긴 했지만, 그 작은 조각으로 한 사람의 전체를 논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똑똑하다고 믿었고, 그 믿음이 가장 큰 함정이었다.





우리는 누구나 엘리자베스처럼 오만하다

엘리자베스를 보면서 깨달았다. 현명한 그녀도 오만함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것을. 그녀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는 강한 확신이 생겼을 때 가장 오만했다. 이미 자신의 생각이 견고해서, 눈앞의 증거조차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신이 믿고 싶은 이야기만 귀에 들어왔고, 그와 다른 다아시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신중하게 내린 결단이라도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작은 틈'을 남겨두어야 한다. 그래야 섣부른 판단을 피할 수 있다. '확신' 그 자체는 옳고 그른 게 아니지만, 내가 강하게 믿고 있는 것이 때로는 편견을 키우는 거름이 되고 있는 건 아닌지 생각할 수 있는 여백을 놓아두는 것. 그것이 오만함에 갇히지 않는 방법이다.



나는 판단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늘 어떤 것을 직관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때문에 무언가를 잘못 판단하는 것에도 자유로울 수 없다. 어떤 대상을 보면 본능적으로 생각이라는 것을 하면서, 무의식적으로 작은 편견의 조각들이 쌓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모든 것에 정답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만의 가치판단을 내리게 되는 것 같다.



가치판단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문제는 나와 다른 관점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할 때 생긴다. 그 순간 시야가 좁아진다. 다양한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을 때 편견은 키가 큰다. 가끔은 확신이라는 이름 아래 오만함이 편견을 키우는데, 그렇게 오만과 편견의 그림자는 늘 가까이에 맴돌게 된다.



오만과 편견을 완전히 지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면, 덜어내는 방향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나를 따라다니는 오만과 편견의 그림자를 옅게 만들어야 하는 이유는 단연 나를 위해서다. 건강한 내면을 가지고 싶으니까. 그랬을 때 다른 사람과의 소통도 원활해지고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 있으니까.





오만과 편견의 반대편에 서있는 '관대함'

다른 사람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때 오만해지는 것 같다. 그때의 생각은 '나는 그러지 않는데 왜 너는 그렇게 행동할까', '그건 좀 아니지 않나'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 이러한 생각들은 내가 맞고 너는 틀렸다는 식의 사고라서 상대방에 대한 강한 편견이 생기게 된다. 결국 타인에게 관대하지 않은 태도로 서있게 되면서 오만해지는 것 같다. 오만함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심해지면, 오만해져서 오만해진 줄조차 모르는 상태까지 가게 된다. 자기 모습이 보이지 않는 순간, 오만함의 늪에 빠져버린다.



어렸을 때는 경험도 적어서 세상에 다양한 섬이 많다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나와 크기도 색깔도 다른 섬을 만날 때마다 놀라기 바빴다. 그런 태도로 있었을 때 나와 다른 것을 보며 은연중에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줬던 것 같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이 많이 더해졌다. 그 생각은 다시, 누군가 자신과 다른 나를 보며 그럴 수도 있다며 나에게 관대했다는 것을 떠올리게 했다. 이런 생각들은 나에게도 어떤 불편한 모습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면서, 타인의 모습도 충분히 넘어가도 괜찮은 것으로 보게끔 해주었다.



오만해지지 않기 위해 필요한 건 관대한 마음이었다. 나의 불편한 모습을 인간적인 실수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타인의 행동도 그렇게 넘어갈 수 있으니까. 선을 넘지 않는다는 선에서, 다른 사람의 이기적인 모습, 영악한 모습, 불편한 모습도 다 그 사람의 인간적인 면모라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나아가, 상대방이 자신의 오만함을 고백한다면 그것을 받아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엘리자베스와 다아시가 자신의 오만함에 대해 솔직하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상대방이 그 마음을 감싸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이 바탕에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잘못을 인정했을 때 상대방이 그것을 무기삼아 더 몰아세울 것 같다면 용기 내어 솔직해지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 둘 사이에는 치명적인 실수를 인간적인 실수라고 안아주는 관대함과 신뢰가 있었기 때문에 솔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오만함을 '옅게' 만들 수 있다

오만함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그것을 옅게 만들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오만함을 잘 알아차리는 일이다. 그래서 진짜 나의 마음을 마주했을 때 그것을 피하지 않고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랬을 때 내가 정말 오만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까.



니체는 "인식에 이르는 길 위에서 그렇게 많은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없다면 인식의 매력은 적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오만함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면 잘 깨닫는 게 정말 중요할 것 같다. 염치 있게 살고 싶어서 계속 부끄러움을 잘 느끼고 싶다. 오만함을 깨닫는 순간이 찾아온면 그 부끄러움을 빨리 인정하고 싶다. 그 편이 오히려 불안감에서 가장 빨리 해방되는 것일지도.



이번에는 오만함을 예방하는 차원의 방법을 생각해 봤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자주 나누는 것이다. 나는 책을 읽고 그것에 관한 어떤 주제라도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때마다 느끼는 건 사람들의 생각이 참 다르구나, 였다. 덕분에 많은 것들이 옳고 그름의 영역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고 의식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하나의 기준으로 무언가를 재단하는 일도 의미 없다는 것 또한 더 자주 의식하게 되었던 것 같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과 서로 다른 관점의 이야기를 즐겁게 나눌 수 있을 때, 오만과 편견을 조금씩 예방할 수 있는 것 같다.





염치 있게 살자

나를 안정감 있고 건강하게 만드는 방법은 오만함을 깨달았을 때, 그 자리에서 부끄러움을 인내하는 일인 것 같다. 오만과 편견을 인지했다면 그것을 회피하지 않을 때, 계속 감추려고 하지 않을 때, 교만하고 오만한 마음을 덜어낼 수 있다. 사람이기에 또 오만하겠지, 자만하기도 하겠지, 무지하겠지 싶다. 그래도 계속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이 있고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조금씩 더 건강해질 것 같다. 계속 염치 있게 살고 싶다. 부끄러움을 계속 알고 느끼는 어른으로 살아가고 싶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완벽한 해방 = 이상하게 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