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라흐마니노프>는 작곡가 세르게이 바실리예비치 라흐마니노프와 심리학자 니콜라이 달의 실화를 바탕으로 창작된 뮤지컬이다. (사진 출처: 경남연합일보)
"아, 열려 있었네요. 닫혀 있는 줄 알았는데."
교향곡 1번이 혹평 세례를 받은 뒤 3년째 은둔생활을 하고 있는 작곡가 라흐마니노프. 어느 날, 라흐마니노프의 사촌형 실로티의 부탁을 받았다며 찾아온 정신의학자 니콜라이 달 박사. 문을 두드리다가 별안간 벌컥 열고 들어서며, 달 박사는 말을 건넨다. "열려 있었네요. 닫혀 있는 줄 알았는데."
뮤지컬 <라흐마니노프>의 주제를 가장 잘 드러내는 대사다. '닫힘', 그리고 '열림'.
'꼭 들려주고 싶은 사람'을 위한 교향곡을 쓰는 데 미친듯이 매달리지만, 차가운 시선과 비난에 결국 라흐마니노프는 마음의 문을 꼭꼭 닫아버린다. 그리고 그 문을 열기 위해 찾아온 달 박사. 배운 지 석 달밖에 안 된 서툰 비올라 연주를 선보이며, '음악'이란 공감대를 형성해 마음문을 열어보려 노력한다. 이때 무대 위 공간 배치와 활용이 매우 인상적이다. 무대는 크게 라흐마니노프의 방, 달 박사가 사용하는 실로티의 방, 그리고 통로처럼 뚫린 중앙 공간으로 나뉘어 있다. 처음에 라흐마니노프는 자기 방 안에만 틀어박혀 꼼짝도 하지 않는다. 달 박사가 몇 번 그 문을 '열고' 들어오려 하지만, 라흐마니노프는 금세 '닫힘'으로 일관한다. 방문도, 마음문도.
그러나 달 박사가 처음에 방문을 열고 들어오며 건네었던 말처럼, 라흐마니노프는 사실 닫혀 있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누구라도 필요했다. 받아들이고 싶어했다. 단지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너무 커서 방법을 몰랐을 뿐.
마음의 문을 닫은 라흐마니노프를 돕기 위해 달 박사는 그의 방으로 찾아온다. (사진 출처: 동아일보)
달 박사는 라흐마니노프가 문을 좀 더 열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한다. 우스꽝스러운 비올라 연주를 하며 다가가고, 라흐마니노프의 스승 쯔베르프와의 기억을 되살려 라흐마니노프가 왜 교향곡을 쓰고 싶어하는지 더 알아가려 한다. 이 때부터 라흐마니노프는 자기 방을 나와 중앙으로 나오기도 하고, 달 박사와 같은 공간을 쓰기도 한다. 라흐마니노프가 과거 기억을 나누며 마음을 조금 연 듯싶자, 달 박사는 "당신은 새로운 교향곡을 쓰게 될 것이며, 그러면 사람들은 당실을 사랑해 줄 것입니다"라며 자기암시기법을 동원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라흐마니노프는 여전히 교향곡을 쓰지 못하고, 달 박사는 조급해진다. 초조해진 달 박사는 왜 교향곡을 쓰고 싶은 거냐며 라흐마니노프를 추궁한다. 라흐마니노프는 대꾸한다. "그럼 당신은 왜 날 치료하고 싶었던 겁니까?" 라흐마니노프의 손에는 신문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사실 달 박사가 라흐마니노프를 치료하려 했던 것은 그의 욕심 때문이었다. 스승 프로이트만큼, 아니 그보다 더 대단한 정신의학자로 인정받기 위해 라흐마니노프를 이용한 것이다. 달 박사가 마음문을 열기 위해 꺼내든 열쇠는 애초에 맞지 않는 열쇠였다. 열쇠를 상처 난 마음에 억지로 우겨넣은 결과는 열리는 듯하다 도로 닫혀 버린 마음문, 그리고 서로에게 남긴 상처. 각자 방에서나 나와 중앙에서 만나기도 하고, 같은 방 안에 함께 있기도 했던 라흐마니노프와 달 박사는 다시 자기만의 공간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리고 한탄한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다시 용기 내어 바깥으로 나온 이는 달 박사였다. 자기 안에 욕심이 있었음을 고백하며, 갗선 이국에서 외롭고 힘들었을 때 마음을 울린 '고향의 노래'를 이야기한다. 가장 깊은 이야기를 꺼내어 놓은 달 박사의 진심이 통했는지, 라흐마니노프도 최면을 통해 저 깊숙이 묻어 두었던 아픈 기억과 마주한다. 그가 그렇게도 교향곡에 집착했던 이유, 그렇게 자신을 몰아붙였던 이유. 그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그의 음악을 좋아했던, 병으로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 누나 옐레나. 라흐마니노프는 사랑하는 누나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못했다는 무거운 죄책감에 시달렸고, 그것이 교향곡에 갈수록 집착하는 원인이 되었다.
달 박사와의 교류, 충돌, 화해 과정을 거쳐, 라흐마니노프는 자신마저 알지 못했던 상처를 깨닫는다. (사진 출처: 뉴데일리)
한가운데, 열린 공간으로 나와 묻어 두었던 속이야기를 쏟아내는 라흐마니노프를 다독이며 위로하는 달 박사. 그렇게 치유가 일어났다. 서로의 방에서 나오지 않고 각자 생각만 했던 두 사람은, 꽁꽁 숨겨두었던 아픔과 속마음을 함께 풀어놓았다. 성공적으로 치료를 마치고 떠나기 전, 달 박사는 라흐마니노프의 방을 바라보며 나직히 고백한다.
"당신이 곡을 쓰든 쓰지 않든, 당신은 이미 사랑받는 사람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는 '닫힘'과 '열림'을 굉장히 잘 풀어내었다. 마음 깊숙이 이야기를 숨겨 닫아둔 두 사람, 라흐마니노프와 달 박사가 서로 부딪히고, 상처를 받고, 다시 화해하고 서로의 손을 잡아 마음을 열어 치유를 받는 과정을, 실제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을 배경으로 풀어놓았다. 무대에는 실제로 피아니스트와 현악 4중주 팀이 함께 올라와 내내 연주를 한다. 이들은 단순한 반주자가 아니라, 엄연히 극의 일부다. 프로 피아니스트의 손끝에서 연주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최면에 걸린 듯 그 선율에 금세 빠져든다. 실제로 극이 끝나기 전 항상 피아니스트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1~3번 중 하나를 연주하는데, 정말 굉장하다. 내가 관람한 날에는 가장 잘 알려진 2번을 연주했는데, 연주가 끝나자마자 전부 기립해서 박수를 쳤다.
아픔을 극복한 라흐마니노프가 곡을 다시 써 냈을 때, 그리고 돌아온 달 박사가 라흐마니노프의 완성된 교향곡을 들었을 때, 이러한 기분이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는 닫힘과 열림, 상처와 치유에 대한 이야기를 아름답고 감성적인 음악과 함께 풀어낸다. (사진 출처: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