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유리동물원>의 바탕이 되는 동명 희곡은 미국의 유명 희곡 작가 테네시 윌리엄스의 대표작이다. 이 극은 윙필드 가족을 통해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헤매며 충돌하는 서민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유리 동물원'은 극중 로라가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관리하며 아끼는, 장 안에 진열된 유리 동물 모형들을 가리킨다. 유리 동물은 빛을 받으면 영롱하게 빛나는 아름다운 존재지만, 누군가 꺼내어 옮겨 주지 않는다면 장 안을 벗어날 수도, 빛을 마주할 수도 없다.
시인을 꿈꾸지만 창고에 박혀 일하는 현실에 괴로워하며 틈만 나면 영화 속 세계로 도피하는 아들 톰, 과거에 집착하며 그 영광을 되살려 줄 '신사'만을 기대하는 어머니 아만다, 순수한 영혼을 지녔지만 동시에 금세 부서질 듯 연약한 로라. 윙필드 가족은 마치 이 유리 동물과도 같다. 현실에 갇혀 벗어나지 못하고 그저 자신을 비추어 줄 과거의 영광, 훗날의 꿈을 기대하는 그들 또한 유리(琉璃) 동물원에서 유리(流離)하는 셈이다.
연극 <유리동물원>은 현실과 이상의 간극에서 충돌하며 방황하는 영혼들에 관한 이야기다. (사진 출처: 엠비제트컴퍼니)
무대는 윙필드 가족이 사는 아파트 내부를 보여준다. 조촐한 의자와 식탁과 소파, '유리 동물원'과 축음기, 벽 정가운데 떡하니 걸린 아버지의 사진. 이 모든 것이 투명한 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인물이 이동하는 것이 훤히 보이는, 뼈대만 앙상한 뚫린 벽이다.
이 투명한 벽이 하나의 거대한 '유리 동물원'이 아닐까. 빛나지만 금세 부서지는 유리 동물처럼, 과거의 영광에서 빛을 얻으려다 차가운 현실에 부딪혀 바스러지는 시대의 영혼들이, 1930년대 낡은 아파트라는 유리 동물원에서 몸부림치고 있음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니었을까.
각자의 유리에 갇힌 그들에게 찾아온 신사 짐은 마치 그들을 유리 동물원에서 꺼내 줄 구원자처럼 보였다. 음악이 흐르고, 즐거운 대화가 오가며, 식사 교제가 이루어지고, 젊은 남녀가 함께 춤을 춘다. 마침내 밝은 햇살 한 줄기가 유리 동물원을 환하게 비추려던 찰나, 갑작스레 밝혀진 짐에 대한 진실이 모든 평화를 깨뜨린다. 진실이 드러난 이후 남은 것은 어설프게 깨진 유리벽 뿐이다. 깨진 틈을 비집고 나가려면 피를 흘리고 상처를 낼 수밖에 없는 공간이 되었다.
로라는 진실을 밝히고 떠나는 짐에게 뿔이 부서진 유리 유니콘을 건넨다. 짐과 왈츠를 추다가 건드려 떨어지는 바람에 뿔이 부러진, 한때 '별종'이었던 유니콘은 이제 여느 말처럼 평범해졌다. 이것은 자기 세상에 갇혀 '별종'으로 살던 로라가 바깥 세계로 나가는 한 걸음을 떼었음을 상징한다. 그런데 로라는 진실을 알고 난 후, 성장한 자신을 짐의 손에 쥐여 내보낸다. 로라는 깨진 유리틈을 지나 스스로 나갈 자신이 없었다. 아픈 진실의 파편에 피흘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로라는 다시 유리 진열장에 전시된 유니콘으로 돌아갔다. 성숙하게 변한 줄 알았던 자신은 다시 환상으로 돌려보내고, 본인은 그대로 유리 동물원에 머무른다.
다른 동물 모형과는 다른 모습을 가진 유리 유니콘은 남들과는 다른,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로라를 상징한다. (사진 출처: 엠비제트컴퍼니)
극 말미에 톰은 결국 유리 동물원을 탈출한 것일까? 부서진 틈으로 겨우 빠져나왔지만, 톰에게도 세월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파편이 있었다. 누나 로라에 대한 지워지지 않는 책임감과 죄책감은 톰을 계속해서 따라다닌다.
"누나의 촛불을 꺼. 지금은 번개가 세상을 밝히거든. 안녕." 톰의 마지막 대사가 무슨 뜻일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촛불'은 톰이 평생 지고 갔던 로라의 파편이자 흔적이 아닐까. 그럼 '촛불을 끄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유리에 갇힌 촛불을 끄고 세상으로 다시 나오라는 것일까, 아니면 반대로 아픈 기억을 되살리는 촛불을 끄고 가만히 머물러 달라는 의미일까? 답은 여전히 유리(琉璃) 안에서 유리(流離)하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