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세이] 오늘, 하루: 경주에서 진 자의 넋두리

2022.08.24, 8:02 p.m.

by 서빈들

나는 어릴 적부터 달리기를 못했다.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달리기 시합을 하면 매번 1등이나 2등을 도맡았다. 아, 물론 뒤에서. 노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 죽어라고 달렸다. 하지만 결과를 바꿀 수는 없었다.
그때는 자꾸만 꼴찌를 차지하는 내 처지가 썩 달갑지 않았다. 그러나 나이를 조금씩 먹어 갈수록 '뭐 어때서'라는 마음이 슬그머니 자리를 잡았다. 어쨌든 나는 노력했고, 최선을 다했으니까. 앞으로도 그럴 테니까. 내가 열심히 했다면 꼴찌가 뭐 대수겠는가 싶었다.
그렇게 "So what?"이라는 태도로 무난히 살아가던 내가, 거의 십여 년 만에, 한 치열한 경주에 몸을 던졌다.

알라딘 중고서점. 그곳은 활자 중독 수준으로 글에 미친 나에게는 개미지옥이다. 글자로 둘러싸여 글자로 채워진 그 공간에서 나는 몇 시간이고 죽치고 있을 수 있다. 또한 그곳은 일종의 보물창고이기도 하다. 생각지도 않게 좋은 책을 반값도 안 되는 가격에 건질 수 있는 장소이자, 절판되어 시중에서는 구할 수 없는 책을 운 좋게 건질 수도 있는 곳이다.
요 며칠 새 나는 그 개미지옥을 수도 없이 들락날락했다. 정말 구하고 싶은 책이 한 권 있는데, 절판이나 다름없는 품절 상태라 통 구입할 수 있는 곳이 없어서였다. 도서관을 이용할 수도 있다지만, 나는 그 책을 반드시 '내 것'으로 만들고야 말겠다는 치기 어린 오기를 품었다.
지난 주간에 그 책이 두어 번 중고서점에 입고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기는 했지만, 번번이 타이밍을 놓쳐 속만 더 쓰리게 만들었다. '죄송합니다, 현재 판매하지 않는 상품입니다.' 얄궂은 한 줄 안내 문구만 미련 어린 눈길로 바라보면서 하염없이 새로고침만 할 뿐이었다.

그러던 중, 오늘 아침, 아르바이트 갈 준비를 끝마치고 습관처럼 무심코 중고서점 앱을 켰다가 내가 구하는 책이 한 지점에 입고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지점 위치를 확인했다. 그런데 웬걸, 서울이 아니었다. 인천 남동구였다.
나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오늘 알바는 오후 5시에 끝나고, 오후 8시 반에 용산에서 영어 수업이 잡혀 있다. 어쩌면 그 사이 시간에 다녀올 수도 있겠다. 지도 앱을 켰다. 경로를 검색했다. 알바 장소에서 서점까지 한 시간 반, 서점에서 수업 장소까지 또 한 시간 반.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 수업 장소에 도착한다면 대략 오후 8시쯤 도착 예정. 좋아, 완벽해! 흠잡을 데 없는 치밀한 계획을 세운 나 자신을 칭찬하면서 가볍게 근무지로 향했다.

오후 5시가 되자마자 흡사 도망치듯이 근무지에서 튀어나와 부지런히 역으로 달렸다. 근무지에서 가장 가까운 역은 사평역. 그곳에서 9호선을 타고 노량진역으로 가서, 1호선으로 갈아타 부평역까지 간 다음, 다시 인천 1호선으로 갈아타 인천터미널역에서 내려 서점까지 걸어가야 했다. 무사히 예상했던 시간에 9호선에 올라탔다. 9호선을 타고 가는 내내, 그리고 노량진역에 내려 인천 방향 승강장까지 이어지는 무지막지하게 높은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는 내내, 나는 계속해서 재고 현황을 확인했다.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꽉꽉 들어찬 1호선 급행열차에 몸을 실었을 때만 해도 책은 착실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원 열차 안에서 선 채로 꾸벅꾸벅 졸다가, 문득 안내방송에 정신을 차렸다. '이번 역은 부평, 부평역입니다.' 좋아, 이제 얼마 안 남았어! 두근대는 마음을 안고 다시 한번 중고서점 앱을 켜서 재고를 확인했다. 그런데 나를 반겨준 문구는, 재고 위치가 아니었다. '현재 재고 0부입니다.'
아뿔싸! 그 책을 구하는 이는 나뿐만이 아니었다. 나 홀로 달리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 나는 경주 중이었다. 같은 책을 구하기 위해 주변 각지에서 달려드는 경쟁자들을 나는 인지하지 못했다. '재고 0부'라는 잔인한 현실을, 지하철로 불과 20여 분 거리에 있는 목적지를 앞에 두고 마주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초등학교 운동회에서처럼, 나는 또 다시 경주에서 지고 말았다.

터덜터덜 부평역에 내려, 인천 1호선을 타는 대신 1호선 상행선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부평역에서 수업 장소까지는 갈아타지 않고 1호선으로 한 번에 갈 수 있으니 좋은 거 아니겠느냐고 위로 아닌 위로를 스스로에게 건넸다. 내 마음만큼이나 덜컹이는 열차에 몸을 싣고, 해가 어둑하니 내려앉으려 할 때쯤 남영역에 내렸다. 편의점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천 원을 내고 한 시간 빌린 보조배터리로 간신히 연명한 핸드폰을 쥐고 수업 장소로 향했다. 수업 시작 시간까지 30분 정도가 남았다. 아무도 없는 놀이터 벤치에 걸터앉았다. 알록달록한 놀이기구는 태울 이 없이 어두운 땅거미 속에 얌전히 들어앉아 있었다. 쓸쓸해 보였다. 십여 년 만에 새삼스레 경주에서 지고 만 나처럼 말이다.



- Bindle.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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