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에세이] 오늘, 하루: 맘대로 안 될 때도 있어서

가끔은 인생이... / 2022.08.29, 5:02 p.m.

by 서빈들


바쁜 하루가 될 것이었다. 일찍 일어나 영어 수업 준비를 마치고, 외할머니와 둘째이모네 가족과 함께 외식을 하고, 네 살 아이의 집에 1대1 영어 수업을 갔다가, 영어도서관 알바를 가서 밤 10시는 되어서야 집에 돌아올 예정이었다. 위 항목 중 '일찍 일어나'를 제외하고는 제 목적을 달성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아침 8시에 겨우 일어나 몽롱한 정신으로 옥수수 하나를 아침으로 씹어넘기고서는, 왠지 모르게 몸을 감싸는 열감에 한없이 나른해지는 몸을 다시 매트리스에 던져 놓고 그대로 두 시간을 더 잤다. 점심 식사 시간까지 한 시간 남짓 남았을 무렵, 이모가 급히 나를 깨웠다. 이모의 시아버지께서 갑자기 건강 상태가 악화되셔서 급히 댁으로 가 봐야 하니, 점심은 나와 사촌오빠만 가서 할머니와 먹으라는 얘기를 전했다. 나는 멍한 정신을 붙잡고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가방에 수업할 자료와 책을 넣고 식당으로 향했다. 곧장 향하려 했으나, 난데없이 쏟아지는 비 때문에 우산을 가지러 다시 집에 들러야 했다. 다행히 점심으로 먹은 가오리찜 맛은 최고였기에, 앞의 정신 없었던 계획 변경과 예상 파괴가 불러들인 혼란을 어느 정도 잠재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또다른 폭풍전야였다.


식사를 마치고 일찌감치 수업 장소인 용산으로 향했다. 시간이 충분히 남았기 때문에, 용산 아이파크몰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영풍문고에 들어가 다음 달 큐티책과 <시어터플러스> 9월호가 있는지 살펴보았지만, 둘 다 재고가 없었다. 살짝 힘이 빠진 채로 다이소에 가서 수업 때 쓸 자그마한 동물 손가락 인형 세트를 샀다. 그렇게 여기저기를 둘러보다가 슬슬 수업 장소로 향하려는데, 아이 어머니에게서 문자가 왔다. 아이가 어린이집에 돌아오자마자 잠들어 버렸는데, 오늘 새벽에 일어났는지 너무 푹 잠들어 버려서 도저히 깨워 수업을 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저녁 6시로 수업을 옮기든지, 아니면 수업을 취소해야한다고 했다. 수업을 불과 한 시간 남겨두고 이런 날벼락 같은 문자라니!

수업을 마치자마자 영어도서관에 5시까지 가서 알바를 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6시에는 수업을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께 취소 처리를 하자고 알려드리고, 영어도서관으로 바로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에 올라타 스케줄 관리를 하시는 선생님께 5시부터 9시까지로 말씀드렸던 알바 시간을 3시부터 7시까지로 변경할 수 있는지 물었다. 곧 답장이 왔다. "선생님, 오늘 근무표에 없어서 안 오셔도 될 것 같아요.

아주 잠시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머리가 멍했다. 그러나 곧 상황이 파악되었다. 앞서 알려드렸던 일정이 영어도서관 측이랑 조율이 잘 안 되어서, 이번 주 스케줄표를 짤 때 월요일에는 아예 나를 뺐다는 말이었다. 아니, 그러면 진작, 아무리 늦더라도 오늘 아침에는 나에게 말을 해 줬어야지! 속에서 무언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기분이 들었지만, 진정하고 답장은 침착하게 보냈다.


이수역에 내렸다. 몇 시간 안에 바쁜 하루는 텅 빈 하루가 되었다. 영화 <당신이 잠든 사이에> 대사가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Life doesn't always turn out the way you plan." 인생은 계획한 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은 김에 계획 없이 채워보기로 했다. 이수역 중고서점에 들렀다가 사당역까지 걸어가 서점을 쭉 둘러보았다(그곳에서도 큐티책과 잡지는 찾을 수 없었다). 2호선을 타고 서울대입구역에 내려 다시 중고서점에 들어가 책 두 권을 샀다. 한껏 무거워진 가방을 메고 버스를 탔다. 숭실대입구에 내려 집 근처 카페로 걸어갔다. 시럽 넣은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유튜브 영상을 보며 카페 와이파이의 혜택을 누렸다. 잔 밑에 깔린 얼음까지 알뜰하게 까득까득 씹어먹으며 생각했다. 가끔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생도 나쁘지는 않구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생을 다시 마음대로 채워넣고서는 비로소 집에 도착했다. 어라, 그런데 뭔가 허전한데.


아뿔싸! 카페에 우산을 두고 왔다.


끝까지 마음대로 되지 않는 하루였다



- Bindle.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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