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금을 든 지 다섯 달 만에 중도해지했다. 시나브로 쌓여 버린 카드값을 돌려막느라 장학재단 생활비 대출, 분할결제를 남발하다 초래된 결과였다. 조금씩 쌓인 돈은 거대한 눈덩이가 되어 내가 도망갈 새도 없이 나를 덮칠 기세로 매섭게 쫓아왔다. 그 눈덩이를 깨부술 '궁극의 무기'를 결국 꺼내들었다. 물론, 비실비실한 경제 개념만 남은 채로 강력한 무기를 냅다 휘두른 대가와 후유증은 톡톡히 치러야 했다.
아침부터 갑작스레 엄마가 통화를 청했다. 그 김에 나는 죄인 된 심경으로 모든 일을 고백했다. 내가 너무 밉고 한심해서, 적금 넣는 데 보태 쓰라고 일부러 돈을 더 얹어 보내주곤 했던 부모님께 너무 죄송해서 엉엉 울었다. 엄마는 담담하게 괜찮다고 말했다. 적금을 깬 것은 물론 아쉽지만, 지금부터라도 다시 새롭게 시작하면 된다고 다독였다. 엄마의 위로는 물론 진심이었지만, 내가 얼마나 철없는 짓을 저질렀는지 너무나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기에 기분이 금세 풀리지는 않았다.
영어도서관 알바를 갔다가 1대 1 영어 수업 장소로 가기 전, 약 한 시간 반 가량이 비었다. 나는 후회와 수치심으로 점철되어, '오늘 하루만큼은 돈을 한 푼도 쓰지 말아야겠다'는,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다소 어이없는 떼를 부리기로 마음먹은 참이었다. 그러나 내 식욕에게 뇌의 결심을 알아채고 조신하게 행동할 만한 눈치는 없었던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오히려 정당한 반항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계속 밀려드는 허기에 나는 결국 백기를 들고 1,250원짜리 편의점 컵사리곰탕면으로 합의를 봤다. 그렇게 배를 잠재우고 났더니 이번에는 몇 시간이고 걷고, 서고, 앉기를 반복한 다리와 허리가 파업 선언을 했다. 이들을 달래기 위해서는 결국 또 5,500원짜리 레모네이드를 곁들인 카페에서의 휴식이 필요했다.
도합 6,750원에 무너져 내린 객기의 잔흔이 마음에 남은 채, 나는 수업할 학생의 집을 향해 터덜터덜 걸었다.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고급스러운 자태가 남아있는 단독주택과 빌라가 즐비하게 늘어선 청운효자동 언덕을 오르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둑한 하늘에 빼곡히 수놓인 전깃줄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가장 세련되고 잘 개발되었다는 서울의 한복판인데도, 세월의 흐름을 함축하여 담고 있는 듯한 오래된 전깃줄 무리는 묵묵히 저 높은 곳을 지키고 있었다. 이리로, 저리로 뻗은 전깃줄이 서로 엇갈린다. 뭉친다. 갈라져 뻗어 나간다. 무언가 어지러우면서도 가지런한, 모순적인 그림을 만들어 낸다. 마치 돈에 된통 데이고 나서도 결국 돈을 벌러 발을 끌며 나아가는 나의 복잡미묘한 처지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