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를 안다고 믿는 것은 오만이다 1

by 한걸음

"모든 일은 이유가 있기 때문에 일어나며,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도 이유가 있어서 만난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모든 만남에는 의미가 있으며, 누구도 우리의 삶에 우연히 나타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내 삶에 왔다가 금방 떠나고 누군가는 오래 곁에 머물지만, 그들 모두 내 가슴에 크고 작은 자국을 남겨 나는 어느덧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아는가 ㅡ 류시화>


사람은 대게 결이 비슷한 사람에게 끌리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생각했었는데 이건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 건지. 나의 내적 무엇이 일으킨 파동이 누군가에게 가닿는다면 그래서 그녀에게 도착했다면 그날은 그녀 또한 큰 파문을 일으켜 나와 닿으려 노력한 날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를 아는 누군가가 말했듯 "어떻게 두 사람이 만나고 있는 거야? 신기해. 정말 이상해."라고 표현했을 정도로 우리는 서로의 반대쪽에 위치한 사람들이다.


이 글은 내 시선에서 바라본 그녀의 이야기이다. 그러니 편향되고 주관적일 수밖에...


프랑스 자수 수강 때 처음 만났다. 늘 그랬듯 제시간 보다 일찍 도착해 첫 줄에 앉아 기다리는 나와 달리 수업이 시작하고도 삼십 분이 지나서야 아무렇지 않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그녀가 신기했다. 앞 줄에 앉는 걸 불편해하는 사람이 많은 걸까. 내 옆자리만 비어 있어 그녀와 짝을 이루게 됐다. 첫 시간부터 늦었으니 따라갈 진도가 만만치 않아 보였다. 지각에도 당당하던 H는 이제야 현실 파악을 했는지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더니 저 멀리 앉아있는 지인과 눈과 손으로 그리고 입모양으로 바쁘게 사인을 주고받으며 자리 이동을 노렸지만 남은 자리가 없어 이내 포기하더니 풀 죽은 모습으로 고개를 푹 숙이는 게 아닌가. 그걸 지켜보는 심정은 이랬다. '뭐야, 절임배추야? 사춘기 여중생이야? 유치하네...'

모른 척 수틀에만 집중하려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어깨를 말아 그 속에 머리를 집어넣으려는 건지 암튼 내 또래의 그러니까 적어도 오십 년 가까이 세상과 맞짱 뜨며 살아왔다면 절대 나올 수 없는 행동의 H였다. "저기요, 수틀에 천부터 끼우세요. 실은 세 가닥 빼서 중간 크기 바늘에 넣고요. 이것 보세요. 이거부터 하시는 거예요." 그렇지. 내 오지랖이 또 나서기 시작했다. 시작은 답답하고 안타까움이었다. 그것이 파동을 일으킨 게 분명하다.


호불호가 분명한 맵짤 한 성격의 나와 달리 H는 모임이 많아 보였다. 늘 이 카페 저 카페를 분주히 이동하며 각기 다른 그룹의 사람들과 어울렸으니까. 가방 안에 주전부리를 한가득 넣고서 만나는 사람들과 나누었을 것이다. 내게 그런 것처럼 말이다. 마치 정을 마구 뿌리고 다니는 사람 같아 보였다. 그러나 알고 보면 아니 조금만 관찰해 보면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디지 못해 몸부림 중이란 걸 눈치챌 수 있었다. H는 취미 생활도 운동도 혼자서는 하지 않는다. 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녀는 방황 중이다. 무엇 때문인지 그녀도 나도 아마 H 주변 누구라도 알 것이다. 조금만 친밀해지면 그녀는 속에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다 토해낸다. 그렇다고 조언을 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주저리주저리 마치 랩이라도 하듯 쏟아낼 뿐. 집중해서 듣다가 첨언이라도 할라치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마."라며 손사래부터 친다. 게다가 "난 진지충이 싫어..."란 말을 들었을 땐 우리는 여기까지구나 싶었다. 문제의 핵심을 두고 온종일 고민하는 나와 달리 H는 그곳에 닿을까 겁을 잔뜩 집어먹고 주변만 뱅글뱅글 돌며 진지해지기를 거부한다. 그걸 지켜보며 점점 그녀와 거리를 두었다.


H와 뜨문뜨문 만나오고는 있다. 아니 주기적으로. 프랑스 자수를 10주간 함께 했고 이후 팝아트를 또 10주간 마지막으로 내가 수묵화를 배운다고 하니 함께하자며 용품만 잔뜩 사두고는 그만둔 상태였다. 밀어내는 나와 끈덕지게 주변을 맴도는 그녀. 이렇게 말하니 뭔가 그녀에게 대단한 문제라도 있다는 뉘앙스인데, 그건 아니다. 오히려 담백하고 꾸밈이 없다. 게다가 올해 인서울 대학에 입학한 아들을 두었는데 이것은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고 본인만의 교육 철학을 꿋꿋이 고수한 성과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기본 성품은 고운 사람인데 일상을 대하는 태도가 나와의 접점이 거의 없다. 시간 약속을 중시하는 나와 흐릿한 그녀. 결과가 중요한 나와 과정을 즐기는 그녀. 아니다. 이것 또한 변명일 뿐이다. 나는 H와의 대화가 불편하다. 내 안의 뾰족함을 반드시 드러나게 하는 그녀와의 대화가, 참으로 불쾌하다.


H는 어제부로 계약이 끝나 오늘은 출근하지 않는 남편이 날건달이라도 되는 양, 그 불만을 내게 토로하고 있었다. "이제 겨우 한나절밖에 안 지났잖아. 계약직 프로그래머 일이 다 그런 것도 알고 있을 테고. 너도 프로그래머였잖아."라고 말하며 한편으론 '이제 시작인 건가. 얼마나 들어줘야 하는 거지?'가 머릿속을 꽉 채웠다. 내 말에 더 흥분한 H의 "나는 아빠 손에서 남편 손으로 옮겨진 사람이야. 그럼 책임을 져야지."라는 말은 내 참을성을 깨부수기에 충분했다. "너, 참 이기적이네. 그리고 무슨 사고방식이 조선시대야? 경제적으로 힘들면 같이 벌어야지." 하고 쏘아버렸다.

난 왜 여기 이 사람과 마주 앉아 있는 걸까. 다시는 그녀와 만나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급한 일을 핑계로 줄행랑치듯 헤어졌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우리는 몇 주 후 다시 마주 앉았다. 강의실 밖 쉼 터에서.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또다시 그녀 남편과, 아들과 그리고 딸의 근황을, 걱정거리를 조금의 눈치도 보지 않고 풀어놓았다. 다른 곳을 보며 흘려듣고 있었지만 계속되는 가족의 이야기에 그만 짜증이 났다. "넌, 너는 없어? 얘기를 하고 싶으면 네 얘기를 해. 네 남편도, 아들도, 딸도 궁금하지 않아. 너는 누구의 와이프, 엄마로만 존재하니? 네 얘기를 듣고 있으면 답답해." 내 말에 놀란 H가 입을 다물었고 나는 그 자리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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