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와 거북하게 헤어진 후 얼마간은 연락이 없었다. 악담을 퍼붓고 한쪽 구석이 불편한 나는 핸드폰만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사과를 하기도 안녕한지 물어보기도 곤란했다. 뭐라고 한단 말인가.'표현이 지나쳤지만 진심이었어. 그러나 예의에 어긋난 어조는 미안해'라고 해야 할까. 변명이지만 듣기만 강요하는 게 답답했다. 그건 대화가 아니었다. 게다가 모조리 통으로 다는 아니지만 불쑥불쑥 지나간 시대 그러니까 우리 엄마마저도 버린 낡은 가치관의 말들은 상처였다. 듣는 것만으로도 폭격당하는 기분이었으니까. 이런저런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발목을 잡았다.
그러다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대단히 놀라운 소식을 푸하하 웃으며 상큼하게 말하는 그녀는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났다. H는 내게 첫 번째로 알리는 것이라며 밥을 사고 싶다고 했다.
"내일 우리 밥 먹어. 아니, 꼭 시간 내서 만나야 해. 알았지?"
어제는 그저께와 같고 오늘은 어제를 복붙 하는 일상에는 힘이 있다. 그게 좋든 나쁘든. 그 힘은 지구에 끌려다니는 달처럼 별 고민 없이 비슷한 하루를 보내게 한다. 이것에 안정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테고 답답함에 탈출하고자 몸부림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변화를 원한다면 과거 유행했던 방 탈출처럼 일상을 벗어나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뱅뱅 돌기만 한 탓에 고정돼 버린 사고의 틀을 깰 여지와 만날 수 있으니까. 찌릿찌릿한 자극이 다른 방향도 보게 하니까.
내가 안다고 믿었던 H는 반복된 일상에 만족하는 사람이었다. 그 금을 벗어나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굴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니 오만한 생각이었다.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어쩌면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녀를 보고 있다. 아주 낯선 H를. "나 다음 주부터 바빠지는 거 알지? 그래서 언니를 꼭 만나야 했어."라며 생글거린다. 눈까지 반짝이며 들뜬 모습에 덩달아 나까지 달큰하다. "너 혼자 해? 정말? 괜찮겠어?" 믿어지지 않아 연거푸 같은 질문만 하는 내게 "그래, 정말 나 혼자라니까."라며 입꼬리에 힘주어 말한다. 그러더니 "언니, 나한테 못되게 말한 거 알지? 그런데 생각해 보니 누구도 여태 그런 말을 해준 사람이 없었어." '지금이다. 사과할 시간.' "당연하지. 사람들은 예의를 지키니까. 내가 미안했어." 내 말 끝에 한참을 망설이던 H는 "언니를 만나면 자극이 돼. 내 주변에 없는 캐릭터거든." 하며 조용히 웃는다.
우리는 각자의 취향대로 비빔냉면과 물냉면을 먹고 카페에 들러 또 각각 선호하는 차를 마신 후 헤어졌다.
그날 온 시간 속, 그녀만 있었다. 그녀의 남편도, 아들도 그리고 딸도 없었다.
내가 알던 H는 닻을 내린 배처럼 보였다. 더 이상 항해를 꿈꾸지 않아 정박해 버린 배. 파도의 일렁거림 만큼만 기우뚱거릴 뿐 동력을 상실한 사람.
경제적 책임은 오롯이 남편에게 있다며 그 그늘을 벗어나지 않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일 년 코스의 간호조무사 자격증에 도전한다. 그것도 혼자서.
그녀가 닻줄을 끊었다.
지구에 끌려다니던 달이 자신만의 궤도로 돈다. 항구와 한 몸이던 배가 다시 바다로 나섰다. 그 힘은 무엇일까. 어디서 왔을까. 궁금했지만 H와 만났을 때엔 묻지 못했다. 그저 신기하고 기특해서 한참을 바라만 봤다.
그녀에게 나는 일탈이었나. 내게 그녀도 그러했는데. 내가 답답했던 것만큼 그녀 또한 꼭 그만큼의 불편함을 참았던 걸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나의 참지 못함은 허공에 내지르는 것으로 끝났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조금씩 그러나 쉬지 않고 점점 부풀어갔던가. 그러다 변화를 갈망하는 탈피 하고픈 힘이 증폭되다 못해 결국 빵 하고 터진 게 아닐까.
H가 내게 속삭이는 것 같다. "언니, 그 줄을 놓아. 머물기엔 아직 일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