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이 내 마음처럼 사랑을 주지 않을 때
삼십대가 되면 사랑에 여유롭고 이별에 대수롭지 않으며 상대방에게 쿨할 줄 알았죠.
이십대 때는 그저 뜨거운 가슴에 매달렸다면 삼십대에는 시원한 관계를 할 수 있을 줄 알았어요.
하지만 우습게도 늘 그렇듯 인생은 내가 계획한 대로 내가 상상한 대로 흘러가지만은 않아요.
삼십대의 사랑도 이십대의 사랑과 별반 다를게 없었어요.
아니 오히려 더 두렵고, 아프고, 고통스러웠어요.
삼십대라는 탈을 썼기에 그에 걸맞는 마음가짐과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압박감이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또는 어색한 사랑과 감정으로 얼굴을 들이밀었어요.
뜨겁게 사랑을 표현하고 쉴새없이 상대와 연결됨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한 남자.
그런 뜨거운 방식의 사랑을 부담스러워 하고 숨으려 하고 극단적으로 잠수를 타거나
피하는 한 여자.
둘사이는 계속해서 쫓고쫓는 경주마의 관계 같았어요.
남자는 여자에게 수시로 전화하고 안부를 묻고 사랑을 확인하려 하지만
그런 남자의 태도를 여자는 부담스러워 하고 귀찮아하고 숨으려 했어요.
남자는 여자의 그런 태도를 보며 자신보다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여자의 마음을 돌리고 싶고 붙잡고 싶어 더욱 애원하고 매달리죠.
하지만 여자는 그런 남자의 태도에 더욱 목이 조여오고 숨막혀
더 벗어나려 안간힘을 씁니다.
하지만 둘은 헤어지지 않았어요.
아니 헤어지지 못했죠.
사랑이라는 감정에, 아니 어쩌면 사랑이라는 감투를 쓴 채 스스로가
그 사랑이라는 것에 속아 이미 나올 수 없는 지경이 됐던거예요.
어느 한쪽이 다른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지 않는 이상 둘은 끝날 수가 없었어요.
어느날 둘은 진짜로 헤어지게 됩니다.
더이상 여성이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는다고 느낀 남자는
자신을 자신처럼 사랑해주는 다른 여자를 찾아 가버립니다.
환승이별.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 기존의 종착점이라 여겼던 여자를 두고
환승을 해서 가버립니다. 더 좋아 보이는 곳으로.
남겨진 여자는 허무합니다.
남겨진 여자는 아파하죠.
남겨진 여자는 배신감에 이를 갈아요.
남자는 이제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주는 여자를 만나 행복한 것처럼 느껴졌어요.
남자는 이전의 여자는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의 여자를 만난것에
죄책감이 들지 않았어요.
서로는 서로를 오해한채 관계는 허무하게 끝이 났어요.
여자는 아파서 울고 슬퍼서 울고 고통스러워 울고 배신감에 울었어요.
하지만 또 삼십대라는 감투를 쓰고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가죠.
여자는 과연 남자를 사랑했을까요? 사랑하지 않았을까요?
남자의 환승은 당연한 걸까요? 배신일까요?
여자는 아마도 이전의 사랑에 크게 아파본 사람이었을 거에요.
모든 것을 다줘도 아깝지 않을 만큼 사랑했지만 결국엔 상처받고
헤어졌을 가능성이 높죠.
그래서 평소에는 한없이 쿨한 삼십대의 전형적인 감투를 잘 쓰지만
진짜 사랑하고 마음깊이 둔 남자에게는 무의식의 방어가 작동해
자신도 모르게 밀어내고 거리를 두고 멀리두려는 거죠.
그것이 자신을 지키는 방법이니까요.
그게 그 여자의 사랑의 방식이었어요. 방목이라는 방임이라는 핑계와 합리화로
자신의 사랑을 표현했던거죠.
남자는 그런 여자의 내면을 무의식을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의 방식과
다른 사랑을 하는 여자의 태도에 서운함이 쌓여갔을 테고 사랑의 간극이 좁혀지지 않자
다른 사랑을 찾아 갔을거에요.
그는 사랑을 하면 한없이 표현하고 서로가 계속적으로 연결된 느낌을 줘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이니까요. 그의 프레임에서 봤을 때 여자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틀림없었기에 환승을 합리화 할 수 있었어요.
삼십대의 사랑은 더 성숙하고 더 발전되고 더 안정감있을 것 같지만
여전히 연습의 연습을 거치는 과정인 것 같아요.
여전히 아프고 여전히 뜨겁고 여전히 어설픈 삼십대의 불편한 사랑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