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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치를 혐오했었다.

by 이각형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사치를 혐오했었다. 왜냐하면 사치는 외면적인 것에 한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은 극단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삶은 오뚝이처럼 쓰러지지 않으려는 의지를 발현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무대인 것이다. 우리는 초대장도 없이 인생이라는 무대로 끌려왔다


삶은 그토록 비자발적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 중에서 자신이 원해서 생을 부여받은 사람이 있는가?


있다면 그는 축복을 받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반대일 것이기에 좋든 싫든 간에 삶을 향한 적극성이 요구된다.


인생은 증명의 과정이다. 자신이라는 존재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삶은 자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삶은 고통과 고난의 연속이었다는 고백이다. 그토록 진정한 참회는 고백에서 출발한다.

나는 무엇을 위해 태어난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언제나 절대자를 상정하기 마련이다. 상정한다는 것은 우리의 삶에 의미가 있기를 바라는 그 무엇이다.

따라서 그 무엇을 바라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가진 것이 별것도 아니라는 고백과 다르지 않다.

아무리 지식을 풍요롭게 쌓아 놓을지라도 허망하다. 삶의 공허함에 동의하기를 절대자가 설정한 그것이다.

필멸의 존재는 반드시 사라진다. 그런데 필멸의 존재에게 생의 호흡을 부여한 존재가 분명히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이 삶은 허상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삶을 부여한 존재가 분명히 있다.

비록 비가시적일지라도 분명히 절대자가 존재한다. 당신이 존재하기 때문에, 당신이 존재한 덕분에 우리가 인간이 의미를 갖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절대자에게 복종할 따름이다. 이것만큼 우리에게 평화를 주는 것이 있을까?

나는 모른다. 그 외의 것을 알지 못한다.

모르는 만큼 알게 된다. 역설적이지만 모르는 것만큼 지식의 범주가 확장된다.

비로소 우리는 의지할 수 있는 그 무엇을 획득하게 된다.

이토록 부질없는 것조차 우리에게 허락해 주셨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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