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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

by 이각형



신앙은 보통 체험의 영역이라고 한다. 직접 체험을 하지 않는 이상 아무리 설명을 듣는다고 해도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처럼 들린다는 것이다.



내가 경험한 체험은 대충 이러한 것들이다. 최근에 발생한 것들부터 말하자면 이렇다.



작년 초부터 출퇴근길에서 성경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제 겨우 1년쯤 지난 것 같다.



그런데 얼마 전 아침에 복잡한 지하철 안에서 성경책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을 때였다. 내 옆에는 행색이 초라해 노숙자처럼 보이는 한 사람이 서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피곤에 지친 검은색 피부결을 가진 사람이었다. 술 한잔 걸치면 거친 말투로 험한 말을 내뱉으며 세상을 등질 것만 같은 험상궂은 인상이었다.



아마도 그의 만만치 않던 삶이 그토록 지치게 만들었으리라. 나는 언제나 그러한 사람들을 만나면 고개를 숙이곤 한다.



내게 주어진 삶의 모습이 언뜻 보기에 평탄해 보이겠지만 실상 나는 을지로 지하도를 걸을 때마다 마주치는 노숙인들을 바라보며 '아, 나도 저들과 다르지 않다'라며 동류의식을 느끼곤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날도 그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나로 하여금 동류의식을 느끼게 만들기에 충분했었다.



침묵하는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일은 그와 같이 묵묵히 입을 닫고 있는 일이리라. 그런 마음가짐으로 성경책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하지만 느닷없이 옆에서 살기가 가득 찬 눈빛이 내 얼굴 위로 쏟아졌었다. 곧이어 "개독교 놈"이라는 말 한마디가 날 선 비수처럼 나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뭐라고 대꾸할 수조차 없었다. 그저 그가 살아온 인생을 내 나름대로 상상해 보며 종교인들, 그중에서도 특히 기독교인들이 그에게 남긴 상처를 짐작하는 일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어느덧 그의 아픔을 동경하는 것도 그에겐 수치와 몰욕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침묵한 채 갈 길을 떠났다.



그리고 2024년 어느 날 텅 빈 집 안에서 거실에만 전등을 켜고 유튜브로 구약시대에 관한 강의를 듣고 있었다. 한참 강의에 몰입해 있었을 때 불을 꺼놓았던 어두컴컴한 안방에서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깜짝 놀라 안방으로 시선을 던졌을 때 누군가가 어둠 속으로 급히 자신의 존재를 숨기는 기척을 느꼈었다. 바로 온몸에 전율이 전해졌었다.



나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었다. 하나님이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모르긴 해도 천사일 것이라고 혼자서 중얼거리고선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었다.



그리고 20년 전쯤 삶의 방향을 잃어버렸다고 느꼈던 적이 있었다. 건강이 좋지 않았고 삶의 목표를 상실했었다.



아무 의미도 느끼지 못하며 방황하던 젊은 시절 운이 좋게도 깊은 잠에 빠졌었다. 그런데 꿈속에서 길을 걷고 있던 내가 갑자기 집 앞에서 숨을 거두게 되었다.



육체를 떠난 영혼이 하늘로 끌려 올라가면서 떠나온 육체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시신이 누워 있던 그곳은 개척교회 앞이었다.



때마침 교회로 오고 있던 개척교회 담임목사님께선 비명에 유명을 달리해 길바닥 위에 차가운 주검으로 누운 젊은이를 가슴으로 끌어안고서는 눈물을 흘리며 그의 영혼을 축복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리며 하늘 위로 올라가던 나는 갑자기 황금빛이 머리 위 하늘을 가득 채우는 것을 느꼈다.



고개를 들어 빛이 쏟아져 나오는 곳을 보았다. 하지만 어떤 물체가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빛의 근원지를 향해 다가갈수록 황금빛은 기쁨의 원친이자 영원의 상징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게 되었다. 다시 또 눈물을 흘렸는데 이때의 눈물은 참회의 눈물이자 기쁨의 눈물이었다.



마치 나는 하나님을 본 것만 같았다. 그리고 눈을 떠보았더니 마치 오열한 것처럼 얼굴은 눈물로 푹 젖어 있었고,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한동안 빠져나올 수 없었다.



그리고 30년 전쯤 조만식 선생의 전기를 읽고 있었다. 아버지의 직장상사가 조만식 선생의 친손주였던가 그랬었다.



그래서 우리 집에 조만식 선생의 전기가 있었던 것 같다. 국사시간에서도 배워 이름을 알고 있었던 독립운동가에 대한 책이라 관심을 갖고 탐독하곤 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엔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는데 갑자기 거실 TV가 켜지더니 브라운관에 조만식 선생이 나왔다. 그러고선 내게 "젊은이여 일어나라"를 세 번 외치고선 사라졌었다.



나는 이때만 해도 장차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 줄만 알았었다. 꿈에서조차 독립운동가가 직접 나타나 일어나라고 종용했을 정도였으니 그런 착각에 빠지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닐 것만 같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용돈을 받기 시작했었다. 용돈을 주시면서 아버지께서는 내게 2가지 조건을 제시했었다.



하나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보는 글자는 성경책에 있는 것이어야 하며 자기 전에도 꼭 성경말씀을 1장씩 읽어야만 했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방학 때 꼭 새벽기도회를 다녀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새벽기도회는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어김없이 나갔었다. 그리고 성경책 읽기는 대학생이 될 때까지 지켰었다.



그래서 취업을 하기 전까지 나는 성경책을 세 번 읽었다. 정확히는 두 번 반이지만.



그리고 작년에 5개월 만에 성경책을 한 번 더 읽었고, 지금도 읽고 있어서 곧 있으면 통틀어 성경책을 다섯 번을 읽게 된다.



그런데도 나는 성경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아무리 쉬운 성경을 읽고 있어도 마치 해설이 없는 법전을 읽는 것처럼 명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상태로 읽기에만 집중하는 초심자에 불과한데도 개독교 놈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것보다 더 억울한 것은 나는 하나님을 보거나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령을 느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에 있다. 나는 정말 기독교의 진리를 잘 모르겠다.



이렇게 어려운 교리는 없을 것만 같다. 현실에서 마주치는 시련 앞에서 교리는 언제나 백지처럼 아무런 말을 해주지 않는다.



하나님이 인간을 자동기계로 만들지 않기 위해 자유의지를 주셨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는 바람에 온갖 재난과 비극을 스스로 자초하고 있다.



기독교의 신은 유일신이자 선한 신이라고 한다. 전 세계의 종교 중 유일하게 유일신 사상인 것도 특징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선한 신이라는 점이 그 어떤 종교하고도 차별되는 아주 뚜렷한 차이점이다.



그런 선한 신이 창조한 인간과 세계는 실제로 선한 일들만 있지 않다. 이러한 모순과 역설을 간파한 사람들이 신학자에게 왜 이런 것이냐고 질문을 던지면 그 간극이 바로 자유의지 탓이라고 한다.



그런 첨예한 고민을 담은 책이 바로 구약이라고 한다. 구약은 이스라엘 민족이 바빌로니아에게 핍박을 받고 있을 때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에 관해서 고심한 끝에 얻은 결론적인 세계관으로 쓴 책이라고 한다.



인간의 모든 악행은 하나님이 시킨 것이 아니었다. 그래, 그건 분명한 사실이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사랑의 하나님, 인격의 하나님께서 왜 이토록 사랑하는 창조물에게 험난한 시험을 거치게 했던 것일까.



왜 모세에게만 목소리를 들려주시고 현존을 알리셨으며 그의 손에 의해서만 갖가지 기적을 일으키셨던 것인가. 그 외의 나와 같은 미물과 같은 인간에게는 신앙을 지키라고 말씀해 주셨으면서도 왜 당신의 뜻을 직접 알려주시진 않으시냐는 것이다.



나는 도저히 모르겠다. 내가 왜 이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내가 왜 이런 모습과 성격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다.



나를 그토록 사랑하신다는 그분께서 아무리 2천 년 전에 나를 대신해서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고 해도 매 순간 탐욕과 불안 그리고 두려움에 휩싸인 채 분투하고 있을 때 아무런 말씀도 해주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이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기도할 때 가끔은 제발 좀 알려달라고 부탁드리기도 한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이냐고 제발 그 길을 알려달라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능력을 주시면서도 왜 내게는 목소리조차 들려주시지 않으신 거냐고 묻곤 한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가시적인 세계만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세계가 있다면서 왜 이토록 비가시적인 세계를 보지 못한 한낱 인간에게 방황하게끔 목소리를 낮추고 계시는 것인지.



차라리 이럴 땐 자유로부터 도피하고 싶어진다. 규율이나 율법이 아니라 그저 당신에게 예속된 상태로 당신이 알려준 대로 들려준 대로 살아가게 해달라고.



그게 바로 내게는 구원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아는 게 전혀 없다고.



나를 인도해 달라고, 제발 나는 유약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걸 양해해 주시길 부탁드린다고 간절히 말하고 싶다.



이토록 나는 불완전한 존재이고 불안을 부둥켜안고 떨고 있는 하나의 별이라고 고백하고 싶다.



(추신)


오늘은 향이 깊은 와인 한 잔을 사이에 두고 이각형이라는 사람에게 털어놓고 싶었다. 비록 내가 취기에 몸을 가누지 못하더라도 이각형이라는 사람은 어지러운 불빛과 수많은 인파를 뚫고 어렵사리 나를 안전하게 집으로 데려다줄 것이기 때문에 그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오늘은 너무도 소음이 심한 날이었다. 여태껏 이렇게 시끄러웠던 날은 없었다. 덕분에 나는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나의 목소리는 어디서 잠자고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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