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니 소유를 통해서 행복을 느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오히려 소유가 나를 방해하는 경우가 수없이 많았다.
무언가를 소유하려는 건 소유하기까지 들인 노력에 대해 은연중에 보상받고자 하는 심리가 기저에 놓여 있었다. 집을 소유함으로써 안락한 보금자리를 꿈꿨던 적이 있던 사람이라면 이런 나의 부끄러운 고백에 어느 정도 동의할 것이리라.
반면에 소유는 항상 대가를 요구했다. 그 대가는 무언가를 얻기 위한, 소유하기 전까지의 노력에 그치는 것만은 아니었다.
집을 가지고 있으면 멀리서는 정부가 보유세를 요구했고, 가까이에선 쉴 새 없이 청결한 내부환경을 주문했다. 이러한 문제는 단연코 집이라는 재산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책 한 권도 그러한 제약에 놓이게 된다. 한 권 한 권이 쌓여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꽤 높은 책탑이 되고 나면 책을 읽었을 때 빠져 있었던 흥미와 유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고민이 뒤따른다.
대신에 책을 보기 좋게 보관할 수 있는 서재라든가 책장이 필요해진다. 그리고 책에 먼지가 쌓이지 않게끔 세밀한 손길도 끊이지 않게 된다.
생명이라는 활기를 갖고 있지 않은 사물들도 소유를 위해 이토록 손이 많이 가는 법이다. 그렇다면 마음을 지닌 사람을 소유하려고 할 때에는 어떠한가? 모르긴 해도 더 큰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명절을 맞이해 친척들과 담소를 나눌 수 있는 시간을 소유하고자 하기 위해서라면 나의 시간을 멈추고 그들을 마음으로 영접해야 한다. 비록 그것이 아무런 즐거움을 주지 않는다고 해도 명절이면 가족의 품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에게는 그 자체가 하나의 즐거움이 되어주리라.
그리고 그 시간이 즐거우면 즐거울수록 우리는 그 시간을 더 길고 오랫동안 소유하려고 한다. 함께 있는 시간을 늘리거나 더 자주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게 된다.
이처럼 우리는 소유를 통해 진정한 기쁨을 누리는 일에는 그 소질이 부족한 편이다. 소유할수록 욕심을 내게 되며 욕심을 낼수록 더 많은 반대급부를 지불해야만 한다.
누군가는 동양의 거자필반 회자정리와 같은 말이 서양에는 없다고 얘기했다. 비록 은연중에 동양문화의 우월함을 드러내고자 했지만, 그 아무리 시적인 표현으로 묘사했더라도 상실은 아픔이고 만남은 기쁨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소유에 따른 아픔이 큰 만큼 어쩌면 인간은 소유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 위해 태어난 것일지도 모른다. 인생이라는 과정, 여정 그리고 모험을 통해 나의 존재에 대해 스스로 동의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숙명을 지닌 채 태어난 존재일지도 모른다.
구름이 가득 찬 하늘이 무겁게만 느껴진다. 다시 한번 눈이 세차게 몰아칠 것만 같은 하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