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 나이가 많다는 말이다. 단어 하나에 불과한 일에 이렇게 신경을 쓴다는 건 그만큼 젊지 않다는 반증일 것이다.
70이면 나이가 많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60이어도 그렇다.
50이라면 어떨까? 60이 보기에 50도 젊다.
40은 중년에 접어들었다는 자각과 함께 지나온 세월을 돌아보게 되고 주변을 살피게 된다. 세월의 흔적이 더듬고 지나간 모든 곳을 보기란 어려울 테지만 마치 큰 빙하가 지나가 움푹 파인 지형을 보고 모른 척할 순 없다.
40은 자신이 나이 들었다는 점을 인지함과 동시에 위로 올라가는 계단이 한없이 높게만 느껴진다. 발아래 디디고 있다고 생각했던 탄탄한 발판은 어느새 후배들이 극성맞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버렸다.
그런 40이 보기에 30은 참 파릇파릇하다. 자신도 저런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는다.
30은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들여놓고 경력을 쌓아가는 단계에 놓인다. 그런 30이 보기에 20은 햇병아리에 불과하고 한편으로는 부럽기만 하다.
20이지만 산뜻한 출발을 하지 못한 이들은 10대의 청소년들을 자각도 하지 못한 채 하염없이 부러운 눈길로 바라본다. 8시도 되기 전에 집을 나서야 하는 중고등학생들은 저학년의 시간에서 저만치 벗어나 마치 단잠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끌려 나온 사람처럼 얼떨떨해한다.
소파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는 이 순간에도 시간이 흐른다. 창밖으로 손을 뻗어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을 잡으려고 하지만 손바닥에 닿자마자 투명한 물방울로 변해버린다.
나에게 있어 나이가 든다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아는 것과 같은 의미를 주기도 하지만 다른 모습을 부각하기도 한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뿌옇게 일어난 먼지를 가라앉히는 것처럼 나이가 들면 주변이 차분해지고 이어서 마음까지도 고요한 호수를 닮아가는 줄 알았다.
그러나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언제나 낯선 상황으로 자신을 몰아가는 일과 다르지 않다. 물론 누구에게나 그렇지 않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낯설다는 건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의 본질처럼 느껴진다.
이런 나 자신을 가장 끝에서 바라본다면 이런 느낌이 들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생의 가장 끝자락을 맞닥뜨린 사람이 60을 본다면 60도 젊은 것처럼 말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이 땅에서 시간을 보냈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생을 마감하는 사람에게 80도 90도 젊을 것이다.
그래서 기업에서는 가장 뒤에 있는 사람의 나이에 맞춰 그 사람 앞에 앉힐 사람들을 고른다. 사장이 회장보다, 상무와 전무가 사장보다, 차장과 과장이 부장보다 젊다.
인간사 모든 일이든 끝에서 본다면 어떨까? 다른 건 몰라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이 거꾸로 흘러간 것은 축복이었을 것만 같다.
늙어서 삶이 시작해 갓난아기로 생을 마감하는 것, 그렇다면 적어도 우리가 원하지 않았던 크고 작은 실수들을 저지르는 일들은 별로 없지 않았을까? 10번 저지를 실수를 한두 번만으로 그칠 수만 있다면 남들과 다른 시간대를 살아간다고 해도 손해 보는 건 아닐 것만 같다.
그렇다면 우리는 최소한 인과관계라는 유령에 사로잡혀 후회로 가득 찬 삶을 피하는 방법을 저절로 습득할 수 있지 않을까?
왜 신은 인간에게 거꾸로 보는 능력은 허락하지 않은 걸까? 그 대신 상상력을 주신 건가?
왜 하필 인간은 앞만 보고 살아가게 된 걸까? 한 치 앞도 못 봐야지만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생을 포기하지 않기 때문일까?
아무리 큰돈을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게 무슨 득이 될까? 재물은 커질수록 인간을 삼켜버리기 마련이다.
재물의 소리에 귀 기울이느라 자신의 영혼이 들려주는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면 이토록 불행한 일이 그 어디에 있을까?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곳에서 살고 싶다. 촤악촤악거리는 파도소리가 닿을 듯 말 듯한 곳에서 살고 싶다.
그곳에서 인위적인 사회의 요구가 아니라 영혼의 필요에 응답하며 책과 글 그리고 산과 바다를 벗 삼아 살고 싶다. 그곳에서 나는 나다운 삶을 살며 내 글의 마침표를 찍고 싶다.
여전히 아름다운 그 바닷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