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Rounders

by 이각형



데이먼이 주연을 맡아 1998년에 개봉한 영화 Rounders가 넷플릭스에 오랫동안 추천 영화로 나오길래 달리 볼 것도 없어 느긋한 마음으로 보게 되었다. 맷 데이먼이라는 배우가 출연했다는 것만으로도 재미는 어느 정도 보장된다고 생각했다.




이 작품은 포커를 소재로 인간의 본성과 삶에 관한 얘기를 풀어낸 영화였다. 사실 나로서는 포커를 잘 모르기 때문에 포커 게임이 극적인 장면을 연출할 때 그저 주인공이 어떻게 되었구나 정도만 알 수 있었을 뿐 포커 게임 자체에 대한 어떤 흥분이라든가 열망 같은 건 느끼지 못했다.




브레드 피트 주연의 머니볼을 볼 때처럼 야구장에서의 열기와 환호성에 가슴이 뛰고 지금이라도 당장 글러브를 끼고 공을 던지기 위해 바깥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도박에는 영 관심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포커는 물론 도박이 아니라 심리전이긴 하지만 그 심리전을 펼치는 판이 형성되는 기제는 도박심리가 깃들어 있다.)



기본적으로 나는 누군가를 속여서 어떤 이득을 취하는 일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운이 좋은 건지 몰라도 7살 때 이후로 작은 것이든 큰 것이든 관계 없이 남을 속일 필요를 느껴 본 일이 없었다. (실제로 이런 면에서 본다면 나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다.)



그래서 도박을 소재로 하는 영화를 볼 때에는 자연스럽게 겉으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드라마의 이면에 드리워진 작품의 중심생각을 찾기 위해 더 집중하게 된다.




포커를 소재로 본성에 관한 얘기를 꺼냈다는 게 어떻게 보면 뭔가 이율배반적이거나 아니면 도박꾼의 흥망성쇠를 그려내는 그저 그런 신파극에 불과할 거라고 예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맷 데이먼이라는 배우가 그리 호락호락한 배우는 아니었다.



인간의 본성을 주제로 한 만큼 분명한 메시지가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본성은 무엇이고 어떤 특징이 있을까?




본성의 특징으로는 무엇보다도 이런 점을 말할 수 있다. 사람의 본성은 억누를 수 없다는 것 말이다. 본성을 속이고 다르게 사는 것도 가능하긴 하지만, 분명히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타고난 본성은 원한다고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어찌 보면 하나의 운명적인 계시와도 같다. 이러한 본성은 삶의 다양한 영역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가장 쉽게 드러나는 예시는 음악적 취향이다. 입맛, 식성도 본성에 좌우된다고 볼 수도 있으나, 입맛은 어떤 문화권에서 생활하는지와 어떤 가정환경에서 성장했는지에 따라 많은 부분이 좌우된다.




특히 새로운 음식에 대한 거부반응은 기존에 익숙했던 음식문화에 얼마나 길들였는지, 새로운 문화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의 정도에 따라 결정되기도 하는데 이러한 것은 문화의 보수적 성향에 따라 달라진다. 반면에 음악이라는 영역에서는 개성의 뚜렷한 색깔이 드러날 여지가 훨씬 많다.




예전부터 나는 BTS라는 문화적 현상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했었다. 심지어 BTS가 얼마나 대단한 명성과 팬심을 확보했는지도 모른 채 BTS의 음악성에 대해 의구심을 보여주곤 했다.




그런 나의 의견은 언제나 BTS 광팬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히고 말았는데 그럴 때마다 싸우기보다는 BTS를 이해하고 싶다며 그들의 노래 중에서 가장 좋은 것들을 꼭 추천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추천곡들을 들어보아도 그다지 내 귀를 잡아당기지도 못했다.




그러다가 대표곡 몇 곡을 더 추천해 달라고 최근에 또 부탁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가 추천한 세 곡 중을 듣고 나서 드디어 BTS를 이해할 수 있었다.




다만, 나의 본성과는 결이 상당히 다르다는 점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 계기가 되었다. 취향이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취향이 본성을 반영하게 되어 있는 만큼 취향의 이면에는 본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오렌지가 오렌지가 되게 만드는 그 무엇이 바로 본질이다. 오렌지가 오렌지가 되도록 하는 그 본질은 오렌지 특유의 색과 같이 다른 형태로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다. 그렇게 표면에는 그 이면의 본질이 살짝 비칠 뿐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의 외골수적 성향은 BTS 문화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던 반응을 정당화하곤 했다. 음악은 예술의 한 종류이며 그러한 예술은 이러이러해야 한다고 나름대로 까다롭게 굴었던 것이다.




대중가요에 대해서도 이런 원칙은 적용하곤 했다. 아티스트라든지 뮤지션이라는 호칭에 대한 자격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자신의 노래에 가사 정도는 쓸 줄 알아야 했다. 작곡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는 분명한 예술가로 보기도 했다.




그저 목소리가 좋아 노래를 잘 부른다던가 단지 안무가 좋아 춤을 잘 춘다는 이유로는 예술가의 경지에 올릴 수 없었다. 더군다나 영어를 잘한다던가 운동을 많이 해서 몸이 좋다고 하는 것도 아티스트의 호칭을 얻을 자격으로는 택없이 부족한 것이다.




그저 아이돌 연습생이라는 신분으로 시간이 많아 춤 연습도 많이 하고, 영어 선생을 붙여줘서 매일 몇 시간씩 회화수업을 듣고, 운동할 시간도 많아서 체형도 멋지게 가꾼다고 해서 아티스트로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런 건 그저 기술, 회화로 말하자면 기교에 불과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것들은 예술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부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름지기 예술이라면 인간적 문제를 직면했다는 점을 보여줘야만 한다.




만일 이런 조건은 대중가요에까지 적용할 수 없다면 최소한 노래의 멜로디라도 좋아야 한다. 노래로 먹고사는 가수는 눈을 현혹시키는 게 아니라 귀를 통해 마음을 울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BTS는 그저 춤 잘 추고 노래 잘하고 잘 생긴 데다가 영어까지 가능한 기능인 정도에 불과했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추천곡을 듣고 나서 그들의 명성이 헛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록 BTS 유행곡은 대부분 창작자가 따로 있었지만 그것들을 훌륭히 소화할 수 있는 끼는 남다른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또한 창작자가 대중가요의 세계적 흐름을 이끌어낼 수 있는 뛰어난 감각을 지녔기 때문에 전 세계를 감전시킬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나의 스타일이 아니었을 뿐이지 실제로 웅장한 비트가 끌어올리는 강렬한 인상은 전 세계 가슴에 열정을 끓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확실히 그동안 우리나라 대중가요와는 그 색채가 달랐다.




BTS의 노래를 감상하는 동안 BTS라는 흐름뿐만 아니라 내 본성의 일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것은 나쓰메 소세키가 그의 작품에서 꺼낸 질문이기도 했다.




소세키는 시안과 철학가의 차이점이 무엇일까라고 물었다. 6년 전에 처음 이 질문을 접했을 때 나는 그저 두 사람은 다르면서도 굉장히 비슷하다 정도의 인상만 갖고 있었다.




물론 지금도 철학가와 시인을 비슷하다면서 다르다고 생각하고는 있다. 대신에 분명한 차이점은 있다.




철학가는 영원한 진리가 있다고 믿으면서 자신의 생을 바쳐 찾아 나서지만 끝내 발견하지 못하는 데 반해, 시인은 영원한 진리를 찾으려고 굳이 노력하지 않지만 시의 세계에서 영원성을 누리고 사는 행복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시인들은 작은 세계 속에서도 진리를 발견할 수 있고 그렇게 발견된 진리의 순간에 머무를 수 있다. 그러나 철학가들은 시간의 가치를 너무도 잘 아는 바람에 오히려 자신의 시간을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영원한 진리가 있다고 믿으면서도 결국엔 그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바람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의 본성은 어디에 더 가까운가?




맥락을 좋아하고 구성된 종합을 작은 부분으로 나누기를 좋아하는 성격상 나는 시인보다는 철학을 더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시를 읽을 수 있진 않았다.




시인이 발견한 숭고한 세계를 감상하기 위해선 시인이 가졌던 그 마음가짐을 갖춰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산문적인 본성을 가진 인간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다.




영화 라운더스는 포커판의 세계를 다루고 있다. 포커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포커를 하나의 작은 인생이라고 여기곤 한다.




그래서인지 포커판에서 나온 명언들이 삶에도 적용할 수 있다며 소개되는 명대사들이 몇 개 있다. "호구들이 돈을 따게 하는 것이 부도덕하다."라는 자본주의적 세계관이 깃든 대사라든지 "가진 패가 좋은 게 없어도, 잘해야 한다"와 같은 열정페이를 말하는 대사들이 있다.




이 영화를 본 여러 사람들이 자아실현이라든가 꿈을 위한 위험감수 등을 주제로 손꼽고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주인공이 겪는 갈등 국면을 헤쳐나가는 데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자아실현도 위험감수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자아실현과 위험감수를 이끌어내는 원동력이었다. 그것은 바로 본성에 관한 지도교수의 조언이자 고백이었다.




이것이 바로 이 영화의 중심생각이다. 본성은 절대로 감춰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성은 감추거나 속일 수 없다. 언젠간 드러나게 되어 있다.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고 현실에 실현시키는 일이 바로 자아실현이고, 자신의 본성을 발견하고 현실로 이양하는 데에 있어서 필요한 기회비용이 바로 위험감수이다.




화분에 씨앗 하나를 심고 꽃이 피게 하기 위해서는 햇빛도 필요하고 물도 줘야 한다. 그렇다고 물과 햇빛이 화초를 가꾸는 일의 주제가 아니다.




씨앗이라는 본성이 발아하고 흙을 뚫고 나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푸른 이파리를 수줍은 듯 내밀다가 결국에는 어린아이의 보드라운 손과 같은 꽃을 드리우는 것이 바로 씨앗이라는 삶의 주제이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는 자아실현과 이를 위한 위험감수를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곧 본성의 발견과 발현을 위해서일 뿐이다.




극 중에서 로스쿨을 다니던 주인공 마이클이 지도교수를 찾아갔다. 교수와 바에 앉아 진을 마시면서 나눈 대화는 따듯한 봄날의 살랑거리는 미풍처럼 온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하지만 이 대화가 영화에서 태풍과 같은 변곡점이 될 줄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다만, 내면 깊은 곳에서 어떤 목소리, 어떤 작은 활기를 애써서 무시하고 있던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교수가 마이클에게 나눠준 자신의 인생에 관한 이야기로 마이클은 한순간 가슴이 달아오른다. 교수의 고백은 다음과 같다.




"우리 집안 남자는 대대로 랍비였어. 이스라엘에서, 그전에는 유럽에서. 그게 내 소명이었지. 난 영재였어. 우리 율법 학교의 자랑이었지. 12살 때 성서 해석에 대한 내 이해력은 40살 성인에 버금간다고들 했어. 그런데 13살 무렵이 되자 난 랍비가 될 수 없다는 걸 알았지."



"왜요?"



"탈무드를 아무리 읽어봐도 신이 안 보이더라고, "



"자신을 속일 수 없었군요."



"노력했지. 미친 듯이 노력했어. 기대를 한 몸에 받았으니까."



"교수도 존경받는 직업이에요."



"우리 가족에겐 아냐. 부모님은 내 결정에 완전히 절망했어. 아버지는 뉴욕에 있는 먼 친척의 집에 날 보냈어. 결국 난 내 자리와 평생을 바칠 일을 찾았어."



"그러고요?"



"난 거기에 완전히 빠졌지. 별 걸 다 공부했어. 법에 관해 모두 배운 거야. 그걸 위해 태어난 걸 마음속 깊이 느꼈지."



"그때로 돌아간다면 같은 선택을 하시겠어요?"



"무슨 선택? 율법학교를 떠나기 전 배운 것은 본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거야. 운명이 우리를 선택하거든."




자산을 자신의 모습 그대로 살아 있게 만드는 그 무엇, 마치 내가 이것을 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 같은 소명을 느끼게 하는 그 무엇이 바로 본질이자 본성이 드러나는 그 무엇일 것이다.




이 영화 한 편을 통해 BTS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었지만, 나의 본성은 BTS에 닿지 않는다는 것도 여전했다. 비록 그것이 몇 년이 걸렸지만 말이다.




인생은 어쩌면 본성이 꽃필 환경, 그 시기를 기다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운이 좋은 사람에게는 그 시기가 일찍 찾아오겠지만 나처럼 운이 좋지 않은 사람은 환갑이 넘어서야 본성을 찾아 나설 자유를 얻게 될지도 모른다.




50이든 60이든지 간에 언젠간 그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감에 어김없이 오늘 하루를 맡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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