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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냉면의 계절: 을밀대와 을지면옥

by 이각형





연일 35도를 넘어서는 무더운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이런 더위에 입맛을 잃기가 쉬운 법인데 이럴 때 시원한 냉면 한 그릇을 먹고 나면 그것만 한 즐거움도 흔하지 않다.


브런치라는 공간에서 음식 취향을 얘기하는 건 개인적인 일이라 머쓱하기도 하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말하자면 나는 평양냉면을 아주 좋아한다.


몇 년 전 해외 생활을 해야 했던 때 가장 아쉬웠던 것 중에 하나가 평양냉면이었을 정도이다. 해외로 이민을 떠나버린 친구가 돌아왔을 때에도 친구와 함께 찾는 음식점도 바로 평양냉면 집일 만큼 친구도 평양냉면의 맛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만큼 나는 평양냉면 예찬론자이다. 한참 때에는 정초부터 목욕재계를 하고 가장 좋아하는 평양냉면 집이었던 을밀대로 찾아가기도 했다.


그토록 평양냉면을 좋아하다 보니 점심 장소를 고르기 전에 같이 먹기로 한 사람에게 평양냉면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고향이 남도 쪽이면 평소 진한 양념이 밴 음식에 익숙하기 때문에 평양냉면 얘기만 꺼내도 질색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젊은 사람들일수록 평양냉면의 오묘한 맛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 수가 적었다. 하지만 의외로 회계사처럼 점심식사를 주로 거래처 접대에 할애하는 경우가 많은 사람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평양냉면의 심심한 맛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렇게 한 명 한 명 평양냉면을 즐기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찾아 점심에 근처 평양냉면 집을 찾아가기도 하는데, 사실 회사 주변에 제대로 된 평양냉면 집은 전무했었다.


평양냉면은 아주 미묘한 차이에 의해 그 맛이 확 달라지기 때문에 평양냉면의 맛집을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일례로 코로나19 때 어떤 평양냉면 집이 위생을 위해 쇠젓가락 대신에 나무젓가락을 준 적이 있었다. 나무젓가락에서 나오는 은은한 화학물질의 냄새가 밋밋한 평양냉면의 향을 덮어버리는 바람에 냉면을 먹는 게 아니라 고무줄을 먹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서울시내에 4대 평양냉면 집이 있다. 사람마다 꼽는 4대 평양냉면 집이 다르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볼 때 우래옥, 을밀대, 을지면옥 그리고 평양면옥이다.


을지면옥은 을지로 3가와 4가 사이 공구상가에 있었다. 을지면옥은 맑고 투명한 육수에 편육과 수육을 한 점씩 넣고 고춧가루를 살짝 뿌려주는 게 특징이다. 유일하게 색깔이 들어간 식재료였다.


4대 평양냉면 집 중에서 육수의 탁도를 비교하자면 을지면옥이 가장 맑은 편이고, 나머지 세 군데는 탁도가 비슷하다. 을지면옥의 시냇물처럼 맑은 육수를 처음 맛보는 사람들은 경악할지도 모른다.


도대체 이 맹물을 무슨 맛으로 먹는 거냐고 할 것이다. 나도 어렸을 땐 그 맛을 알지 못했었다.


맹물에 메밀면을 풀어서 고기 두 점과 식사를 마쳐야 한다니 그들에게는 너무도 맛없는 한 끼 식사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맑은 육수의 미묘한 맛을 느끼게 되는 순간 그러한 평가는 어느새 사라지고 만다.


을지면옥은 술안주로 편육과 수육을 팔고 있다는 게 다른 특징이기도 하다. 편육은 돼지고기로, 수육은 소고기로 만드는 차이가 있다.


또한 4대 냉면집 중에서 노령층의 손님 비중이 가장 높은 곳이 을지면옥이다. 그 이유를 추정하기로는 다른 평양냉면 집에 비해 상대적으로 지하철역과 가깝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구전으로 들려오는 바에 의하면 을지면옥이 평양 시내에서 먹던 그 맛과 가장 비슷하기 때문에 실향민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라고도 한다. 가장 맑은 육수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곳이지만 을지면옥 특유의 그 맛이 있기 때문에 나도 굉장히 좋아했던 곳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을지면옥이 있던 자리가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어 3년 전엔가 문을 닫았다. 그러다가 2024년 5월쯤 종로 2 가쪽에 새롭게 오픈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을지면옥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들뜬 마음으로 찾아갔었다. 9월 중순경이라 점심시간에 그렇게 많은 인파가 몰려오진 않았었다.


들뜬 마음으로 대기하고 있다가 첫맛을 본 순간 고개를 갸우뚱했다. 뭔가 맛이 달라졌다.


내심 이게 아닌데라며 젓가락을 연거푸 몇 번 더 놀려보았지만 원래의 맛을 느낄 수 없었다. 결국엔 삼분의 일쯤 먹어보고선 고개를 가로젓고 말았다.


맛이 변해버렸다. 이제는 굳이 발품을 팔아 먼 곳을 찾아갈 필요가 없어졌다.


정말 많이 아쉬웠다. 마치 오랜만에 모교를 찾아갔지만 아는 얼굴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게 된 것처럼 옛날을 그리워하기만 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도 품고 있었다. 그렇다면 을밀대야말로 나를 실망시키진 않으리라.


작년 초겨울 무렵 을밀대를 찾아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수육과 함께 맥주 한 병을 주문했다.


날이 추워진다는 소식이 들려서 그런지 몰라도 확실히 한여름에 비해 을밀대를 찾는 손님의 발걸음을 줄어들어 있었다.

한여름에는 11시에 도착해도 오랫동안 기다려서 1시가 다 되어서야 냉면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기다리는 줄이 길었다. 그만큼 인기가 많은 을밀대에 대한 기대감은 상당했었다.



평양냉면은 마치 커피를 마시는 것처럼 음미해야만 그 맛을 알 수 있다.


커피를 마실 때에도 그저 카페인 복용을 위해 먹는 것이 아니다. 커피는 향으로 즐기는 호사스러운 기호식품의 대표 격이다.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물고 있는 상태에서 바로 목구멍으로 넘기는 것이 아니라 마시면서 콧속으로 들어온 들숨과 함께 반쯤 삼킨 뒤에 날숨을 통해 콧등을 스치고 지나가는 그윽한 향기를 즐겨야 한다.


손끝으로 붙잡을 수 없는 그윽한 향기가 콧등을 가득 채운 순간 오로지 그 향에 집중함으로써 커피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호사스러움을 최대한 향유하는 것이 바로 커피를 즐기는 하나의 방법이다. 자고로 우리의 고풍스러운 선조들은 이러한 향에 대한 특유의 감수성을 들을 문 자를 써서 문향(聞香)이라는 말로 대신했었을 정도이다.


문향의 경지가 자연을 대상으로 하면 봄향기를 탐하는 것이고, 음식을 대상으로 하면 미묘한 풍미의 그림자를 마음으로 탐하는 것이 된다.


그만큼 맛을 깊이 있게 음미하는 데에 약간의 노력이 필요한 음식이 바로 우리의 평양냉면이다. 이렇게 평양냉면에 대해 예찬론을 펼치고 있지만, 나 또한 이 음식의 별미를 깨닫는 데에 꽤 오랜 시간 동안 시행착오를 겪었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알게 된 미묘한 맛이기 때문에 을밀대에 대한 나의 애착은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와도 같았다. 그런데 첫술을 뜨고 나서 을밀대 본점의 맛이 변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을밀대는 육수도 육수지만 면발에서 다른 냉면집과 차별되는 곳이었다. 메밀이 거멓게 탈 정도로 볶아서 뽑은 면이라 구수한 향이 베어 있고 면발도 굵게 뽑기 때문에 식감도 더 좋을 뿐만 아니라 배속도 든든해지는 특징이 있었다.


그런데 그 면발이 새하얗게 변해버렸고, 굵기도 매우 가늘어졌다. 그래서 식감도 달라졌고 구수한 내음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변해버린 맛은 곧 변해버린 친구처럼 멀게만 느껴졌었다. 맛 좋은 평양냉면집을 잃어버린 것이 꼭 고향을 잃어버린 것처럼 다가왔다.


사실 사무실 근처에 을밀대 분점이 하나 있었다. 처음 생겼을 때 반가운 마음에 미어터지는 대기줄에도 불구하고 먹어 봤지만 본점의 맛이 아니라서 상당히 실망했던 기억이 남아 있었다.


본점마저도 이렇게 맛이 달라져버렸으니 더 이상 그 맛을 볼 곳이 사라지게 된 셈이었다.


그러다가 날씨가 너무 뜨거워진 바람에 뜨거운 국물은 부담스럽고 입맛도 없어서 을밀대 분점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정말 의외로 분점에서 옛 본점의 맛이 나는 것이었다.


물론 아주 약간의 미묘한 차이가 있긴 했지만 거의 90%쯤 본점과 같아졌다. 그래서 정말 반가운 마음이 들어 오랜만에 친구를 만난 격이었다.


결국 아주 흡족하게 한 그릇을 해치우고 나서 계산대로 이동했다. 아쉬움과 반가움에 들떠서였는지 계산해 주시는 분에게 이런 말을 남기고 말았다.


"여기가 본점보다 훨씬 맛있어요. 본점이 맛이 변해버렸어요."


이렇게 애정하던 두 평양냉면 집이 사라졌지만 그나마 한 집을 다시 찾아내게 되었다. 오늘도 날이 뜨겁다.


평양냉면이 생각나는 날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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